인물평전<도마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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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평전<도마 안중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2. 본 론
(1) 안중근 연보
(2) 『소설로 읽는 도마 안중근』
① 저자 소개
② 목차 소개
③ 각 장별 요약
(3) 소설로 읽는 도마 안중근 비평

3. 결 론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합치되어 지식층에 널리 읽혔던 서적으로 김구도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를 읽고 사상전환을 경험, 구학문(舊學問)에서 신학문(新學問)을 포괄하는 지적확장을 체험하였다.
) 「안중근연구」, p15
그 후 진보적인 계몽·교육활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다든가 천주교에 입교· 교리의 전파, 나아가 프랑스어를 습득하는 등 본격적인 전반기의 실력양성운동을 실천하게 된다. 또한 다른 프랑스 선교사인 Le Gac신부의 충고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올바른 정세판단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그는 을사조약 체결 후 상해(上海)와 산동(山東) 지역에 가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하려했다. 이는 그동안 국내에서 의병전쟁의 수많은 실패를 보아 와서 국내보다는 국외가 더 나을 것이란 생각에서였으며, 반대로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러일전쟁 이후에 그 중점이 차츰 무장투쟁으로 옮겨가더니, 마침내 5조약과 7조약의 체결 이후 그는 해외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에 뛰어들었으며,
) 「공판속기록」, p7
이때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 위의 책, p9, 41, 136
그리하여 마침내 독립군의병 참모중장 특파독립대로서 이토를 사살한 것이었다.
) 위의 책, p41
계획서에 넣었던 영화<도마 안중근>에 대한 비평은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 <도마 안중근>도 감독의 온갖 왜곡과 허구로 가득하였으며,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할 때 쓴 총이 브라우닝 권총이 아닌 리볼버 권총으로 나오는 등 고증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각종 총격 씬에서는 배우 유오성이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것인지, 주윤발을 연기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삼류 홍콩 느와르영화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생략했습니다. 한 마디로 『소설로 읽는 도마 안중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영화였습니다.
참 고 문 헌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안중근의사 자료집』, 국학자료원, 1999
백기인(白寄寅), 『安重根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994
사이토 타이켄, 이송은 옮김, 『내 마음의 안중근』, 집사재, 2002
이이녕(李二寧), 『소설로 읽는 도마 안중근』, 도서출판 선미디어, 2004
최이권(崔利權), 『愛國衷情 安重根 義士(義士의 傳記, 裁判速記錄, 無罪論)』, 法經出版社, 19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安重根과 韓人民族運動』, 국학자료원, 2002
안중근 연보





1879. 9. 2
황해도 해주부에서 안태훈(安泰勳)과 조(趙)마리아의 삼남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
(7세)
해주를 떠나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안중근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를 공부했고, 사냥을 즐기면서 사격술을 익혔다.
1894년
(16세)
김아려(金亞麗)와 결혼하여 후에 2남1녀를 두게 되었다. 이 해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실전에 참여했다.
1897년 1월
(19세)
안중근은 프랑스 선교사 빌렘(Wilhelm)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Thomas)이다.
1899년 - 1905년
(21세-27세)
빌렘 신부를 도와서 천주교 선교사업을 하고, 또한 총대(總代)로 추대되어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1905년 6월
(27세)
러일전쟁 후 일제의 침략을 피해서 중국 상하이로의 이주를 생각.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양성이 중요함을 확인하고 다시 귀국하여 애국단체의 확장,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투신하고자 했다.
1905년 12월
대한 독립을 쟁취하는 날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1906년 3월
(28세)
진남포에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했고,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을 받았다. 당시 진남포 성당에서 설립했던 돈의학교(敦義學校)와 삼흥학교(三興學校)를 맡아서 운영했다.
1907년 초
(29세)
국채보상운동 관서(關西) 지부에서 활동했다. 학교 운영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평양에 삼합의(三合義)라는 석탄회사를 세웠다.





1907년 8월
망명을 결심하고서 한국을 떠나서 간도지방을 거쳐 블라디보스톡 으로 향했다.
1907년 겨울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서 임시 사찰직(査察職)을 맡아보았다. 의병부대의 창설에 착수, 그 준비단계로 동의회(東義會)를 조직했다.
1908년 초
(30세)
연해주 한인촌의 지원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해서 총독에 이범윤(李範允), 총대장에 김두성(金斗星)을 추대하고, 안중근 자신은 참모중장(參謀中將)의 임무를 맡았다.
1908년 4월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 승전한 후 해삼위로 귀환했다.(제1차 의병전투)
1908년 6월
재차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 부근 및 신아산(新阿山) 부근으로 진공, 승전했으나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연해주로 귀환했다.(제2차 의병전투)
1909년 1월
(31세)
엄인섭(嚴仁燮) 등 11명의 동지와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다짐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1909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대동학교(大東學校) 학감 및 한인민회(韓人民會)의 고문을 맡아 활동했다.
1909년 9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원동보(遠東報)를 통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간행되던 한인 교포 신문사인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에서 이토오의 제거를 계획했고,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과 함께 '특공 유격대'를 조직해서 하얼빈을 향해 출발했다.
1909년 10월26일
이토오 히루부미를 하얼빈에서 제거했다. 의거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게 체포되었고,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909년 11월 3일
여순 감옥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1910년 2월 14일 (32세)
안중근 사건 제6회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10년 3월 19일
빌렘 신부로부터 고해성사를 받았다.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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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8.24
  • 저작시기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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