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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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하드코어 포르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성 과학
1) 근대 서구의 섹슈얼리티
2) 지식/권력/쾌락의 결절점
3)푸코를 넘어서

2. 하드코어 포르노의 스타일

3. 백지영 비디오
1)아마추어 포르노
2)코믹함, 도착, 파토스

4. 포르노와 남성 판타지

본문내용

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탈주체화시킨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혹한 힘으로. 정신분석학 체계에서 전복적 남성 주체성이 출현하는 지점은 상실했다고 오인했던 것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그래서 거세에 대한 보상을 타자에게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때이다. '아, 이게 나의 증환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성찰적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향락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분리(separation)"(PF, p 50)가 발생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요점이다. 지금까지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남성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살펴봤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주체화(subjectivation)는 증상과 환상의 결합으로서 증환(sinthome)에 대한 동일시(identification)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동일시 과정에서 개인은 종속화(subjection)된다. 물론 전체는 비-전체이고, 동일시 과정에 실재계 차원의 빈틈과 공백이 있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주체화'는 개인을 사회적 질서의 차원에 '복종'(subjection)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는 개인을 특정한 주체로 구조화하는 차원에서의 주체성(subjectivity)을 사고해야 하지 않을까. 동일시의 메커니즘에서는 어떤 개인을 특정한 주체로 생산하는 구조의 폭력(협박과 강제, 공포, 그리고 벤야민이 말한 '신화적 폭력'과 같은 것)이 쉽게 잊혀진다. 때문에 우리는 구조가 개인을 특정한 주체로 생산하고, 주체란 그러한 구조(권력)에 의해 생산된 결과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주체로서 '주체성의 적대적 생산'(antagonistic production of subjectivity)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은 최악의 파국을 막기 위해 자신의 증환(sinthome)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증환을 억제하는데 부분적으로 성공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을 넘을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은 이런 면에서 현상유지적인 성격이 강하다. 정신분석학의 효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증환 자체가 혁명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은 이를 휴머니즘이라고 공박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환에 대한 동일시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의 욕망 이론이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다. 이제 이들의 관점에서 포르노를 사유해보기로 하자. 우선 포르노는 쾌락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욕망에 해당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들뢰즈는 「욕망과 쾌락」에서 양자를 구별한다. 들뢰즈에게 쾌락은 욕망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법칙이다.
나는 쾌락에 어떤 긍정적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망이 내부적으로는 법칙에 복종적이고 외부로부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에 의해 야기되는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욕망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은 부정된다.
욕망이 결핍이 아닌 배치, 정동(affect), 내재성의 장, 강렬도, 기관없는 신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쾌락은 한 사람, 혹은 한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다. 그것은 재 영토화이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욕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핍의 법칙 및 쾌락의 규범과 연관되어 있다.
질 들뢰즈,「욕망과 쾌락」,『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pp 110-112
들뢰즈에게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재 영토화의 수단이다. 하지만 쾌락이 욕망을 전제한 개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욕망과 쾌락의 관계에서 욕망의 생산은 쾌락에 의해 억제되지만, 쾌락은 욕망을 전제하며 욕망의 현실적 형태는 언제나 쾌락(권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욕망과 쾌락의 관계를 선형적, 위계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쾌락에 내재한 욕망의 힘을 어떻게 착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 욕망은 쾌락에 의해 억압되지만, 환상은 무의식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들뢰즈, 가타리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환상을 바라본다. 이들이 말하는 환상은 '욕망하는 생산'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낳은 특정한 역사적 산물인 집단환상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집단 환상이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맺고 있는 접속의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타리는 도덕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검열의 폭력에 맞서, "환상 표현 소재의 이전·이동·전환에 관련된 환상생태학"
"폭력의 다양한 구체적인 모습들을 '상상해 내기' 위한 영구한 관용과 독창성을 결여한다면, 사회는 폭력의 구체적 모습들을 현실 속에 결정화시켜 버릴 위험을 지닌다." 펠렉스 가따리, 『세 가지 생태학』, 윤수종 옮김, 동문선, 2003, pp 43-45
을 주장한다. 들뢰즈, 가타리의 주장은 낭만주의적이거나, 남성 중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미 페미니즘과 노마디즘 사이에는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없는 틈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욕망하는 생산이 '기관 없는 신체'에 등록되면서 수많은 격자들과 프레임들을 만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독신기계(celibate machine)는 수많은 격자들과 굴곡들을 가로지르면서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독을,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의 실천'을 경험한다. '비참함과 영광'을 동시에 경험하는 독신기계. 우리는 욕망하는 생산, 구성권력, 다중, 독신기계가 언제나 권력과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영토화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독신기계 스스로 내적인 강렬도를 통해 감각적 쾌락과 고통의 정동들을 선택, 조절, 관리한다는 점이다. 구성적 존재론은 언제나 권력 내에서, 그 권력을 상대로, 그 권력을 넘어서서,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시키면서 리좀적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접속하는 것이며, 그런 만큼 생성의 반복이며, 차이의 반복이다. 물론 여기에는 '공통개념'에 기반한 '적합성'의 윤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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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5.08.30
  • 저작시기2005.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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