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서론
Ⅱ. 프랑스 혁명의 이상: 혁명에 대한 긍정적 해석
1. 이념적이고 사회적인 혁명
2. 구제도의 모순
3. 새로운 문화사적 접근
4. 혁명의 위대한 유산
Ⅲ. 프랑스 혁명의 현실: 혁명에 대한 부정적 해석
1. 비 이념적인 혁명
2. 존재하지도 않았던 ‘구제도’
3. 혁명 이전 문화와 이후 문화의 연속성
4.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
Ⅱ. 프랑스 혁명의 이상: 혁명에 대한 긍정적 해석
1. 이념적이고 사회적인 혁명
2. 구제도의 모순
3. 새로운 문화사적 접근
4. 혁명의 위대한 유산
Ⅲ. 프랑스 혁명의 현실: 혁명에 대한 부정적 해석
1. 비 이념적인 혁명
2. 존재하지도 않았던 ‘구제도’
3. 혁명 이전 문화와 이후 문화의 연속성
4.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
본문내용
장기적인 흐름에 결코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으며 다만 혁명가들이 그들의 뜻에 맞게 축제를 정착화 시키기 위하여 혁명에 부합되었던 주제를 모티브로 삼았을 뿐이다.
4.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
<인권 유린과 백색테러>
혁명은 너무나 많은 피를 요구했으며 박애를 주장했던 혁명은 박애와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사람의 목숨을 대량으로 빼앗아 갔다. 프랑스 내에서 테러로 약 4만명이 사망했고, 대외 전쟁에서 약 1백만명이 죽었다. 혁명 정부에서 주도하였던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불러 일으켰다. 이른바 ‘백색 테러’분자라고 불려지고 있는 반테러리스트와 반혁명분자들은 혁명 정부가 저지른 테러의 산물이었다. 혁명의 당위성과 위대함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백색테러’의 연구는 기피되어 왔으나 최근 연구결과 정부 주도의 테러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과는 달리, 백색 테러는 ‘밑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9월 학살, 방테에서의 비극, 그리고 ‘인권선언’>
정통주의 역사들은 9월 학살을 혁명의 중심적인 흐름과는 관계가 없는 단지 하나의 불행했던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9월학살이 혁명 도중의 수많은 학살에 신호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은 잡범이나 패륜아들이 아니었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진 반혁명적 인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혁명을 진전시키는데 필요한 희생자였을 뿐이다. 9월 학살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살인에 의존할 수 있다는 프랑스 혁명에 관계된 핵심적인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근대화에 기여하지 못했던 혁명>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근대적인 국민주의와 애국심을 탄생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18세기의 7년 전쟁 이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애국심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 따라서 프랑스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애국주의적인 문화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었지 혁명이 낳은 결과는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 혁명이 근대 국민주의와 애국심을 탄생시켰다는 이유에서 혁명의 근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이다. 이밖에도 혁명은 혁명 당시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와 인권은 단지 말로만, 그리고 남성에게만 적용하였고, 여성에 관한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의 과격성은 타국의 개혁주의자들의 개혁안을 국민들이 불신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영향만 남긴 혁명>
프랑스 혁명은 허무하게 끝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 사회에 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남겨놓고 마감되었다. 우리가 혁명의 업적으로 알고있는 중앙집권, 반 사제주의, 농민 계층의 독립 등의 진보적 개념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혁명이 후세에 남긴 유일한 업적은 결코 복구할 수 없는 대규모의 문화적 유산과 예술작품의 파괴 뿐이었다. 그리고 혁명이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테러가 남긴 교훈이었다.
4.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
<인권 유린과 백색테러>
혁명은 너무나 많은 피를 요구했으며 박애를 주장했던 혁명은 박애와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사람의 목숨을 대량으로 빼앗아 갔다. 프랑스 내에서 테러로 약 4만명이 사망했고, 대외 전쟁에서 약 1백만명이 죽었다. 혁명 정부에서 주도하였던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불러 일으켰다. 이른바 ‘백색 테러’분자라고 불려지고 있는 반테러리스트와 반혁명분자들은 혁명 정부가 저지른 테러의 산물이었다. 혁명의 당위성과 위대함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백색테러’의 연구는 기피되어 왔으나 최근 연구결과 정부 주도의 테러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과는 달리, 백색 테러는 ‘밑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9월 학살, 방테에서의 비극, 그리고 ‘인권선언’>
정통주의 역사들은 9월 학살을 혁명의 중심적인 흐름과는 관계가 없는 단지 하나의 불행했던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9월학살이 혁명 도중의 수많은 학살에 신호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은 잡범이나 패륜아들이 아니었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진 반혁명적 인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혁명을 진전시키는데 필요한 희생자였을 뿐이다. 9월 학살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살인에 의존할 수 있다는 프랑스 혁명에 관계된 핵심적인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근대화에 기여하지 못했던 혁명>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근대적인 국민주의와 애국심을 탄생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18세기의 7년 전쟁 이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애국심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 따라서 프랑스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애국주의적인 문화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하나의 원인이었지 혁명이 낳은 결과는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 혁명이 근대 국민주의와 애국심을 탄생시켰다는 이유에서 혁명의 근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이다. 이밖에도 혁명은 혁명 당시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와 인권은 단지 말로만, 그리고 남성에게만 적용하였고, 여성에 관한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의 과격성은 타국의 개혁주의자들의 개혁안을 국민들이 불신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영향만 남긴 혁명>
프랑스 혁명은 허무하게 끝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 사회에 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남겨놓고 마감되었다. 우리가 혁명의 업적으로 알고있는 중앙집권, 반 사제주의, 농민 계층의 독립 등의 진보적 개념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혁명이 후세에 남긴 유일한 업적은 결코 복구할 수 없는 대규모의 문화적 유산과 예술작품의 파괴 뿐이었다. 그리고 혁명이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테러가 남긴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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