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교회 선교와 복음의 유입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한국인 세례자와 성경번역

3. 첫 공동체와 선교사

4. 본격 선교와 제중원

5. 의료선교와 근대학교

6. 조직교회의 시작

7. 선교사 갈등과 네비우스 정책 수립

8. 원산과 평양 부흥운동

9. 나가는 말

본문내용

캐나다장로회가 각각 협정을 맺었다.감리교도 1901년 남감리회와 협정을 맺었고,1905년에는 북장로회와 미감리회,1907년 미감리회와 남장로회,1909년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등이 각각 협정을 맺었다.서울 평양 원산 등 대도시는 두개 이상의 선교회가 공동으로 선교했고,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해 분할했다.
8. 원산과 평양 부흥운동
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1903년 중국 여선교사 화이트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시작했다.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 신도,침례교 선교사들도 참여한 연합 기도회 모임으로 발전됐다.
기도모임 중에 캐나다출신의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회개하는 기도를 시작했다.그는 3년동안 강원도지역에서 선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며 자신의 무능함을 털어놓았다.그는 무능한 원인을 우월의식과 자만감,권위주의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하디 선교사의 고백은 한국 선교사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다.1904년 1월에 열린 기도모임에서는 롭 선교사가 성령 체험을 하고,전계은(全啓殷) 정춘수(鄭春洙)도 은혜를 입어 부흥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원산의 부흥운동은 평양으로 이어졌다.1906년 여름에는 평양주재 선교사들의 주도로 계속 사경회가 열렸다.또 장대현교회 길선주장로가 주도하는 새벽기도회가 매일 계속됐다. 그 무렵 전남 목포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남감리회 소속 저다인 선교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때 교인들이 앞다투어 회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다.매년 개최되던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였다.1월13일 주일에 시작된 사경회는 첫날 아무런 감흥없이 지나갔다.성령의 역사는 14일부터 시작됐다.블레어 선교사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결코 혼란이 아니었다.영(靈)과 성(聲)의 엄청난 조화였다.나에게는 마치 폭포소리처럼 들렸다.그것은 여럿이 외치는 소리였지만 하나였다.그것은 유일하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한분이신 하나님께로 들리움을 받는 체험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사경회는 9일동안 계속됐다.각 처에서 모였던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들은 각자의 죄를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하기도 했다.신자의 집이나 불신자의 집이나 가릴 것 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변상했다.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는 곧 전국으로 퍼졌다.평양신학교와 평양여자고등학교,감리회 부인사경회로 이어졌다.또 당시 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를 이끌었던 리 스왈른 헌트 선교사 등과 길선주는 각기 선천과 광주,대구,의주,서울로 옮겨가 성령의 불을 지폈다.성령의 역사는 1910년까지 계속돼 중국과 만주,몽고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부흥운동이 큰 교세의 변화를 보이진 않았다.교인들의 회개와 신앙갱신의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대부흥운동으로 교인 개개인이 신앙의 성숙과 행동의 변화를 나타냈다.
평양 사경회의 열기가 식어가자 1910년 선교사들은 다시 부흥운동을 준비했다.개성에서 활동하던 남감리회 스톡스 선교사가 5만명 전도운동을 제창하자 1909년 선교연회에서는 `1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를 채택했다.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위기감을 신앙으로 이겨보자는 뜻에서 이같은 운동을 기획했다.`1백만 구령운동'은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연보' 방법과 대규모 문서전도운동으로 펼쳐졌다.이같은 부흥운동과 1백만구령운동은 민족사적 시각에서는 몰역사,탈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그러나 부흥운동은 보다 견고한 민족교회화 작업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오히려 일제는 부흥운동과 1백만구령운동으로 인해 기독교와 교회를 견제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돼 105인사건을 조작하고, 3 1운동에 대해 과잉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결국 겉으로는 개인신앙에 치중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민족교회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고,그로 인해 민족운동에서 교회조직과 인물이 신앙과 민족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9. 나가는 말
한국 선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먼저 진행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교회 설립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시작됐다. 일부 교회사학자들은 1885년을 선교 시점으로 잡는데 이견을 갖고 있다. 이때가 첫 조직교회가 생긴 때도 아니고 서양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때도 아니기 때문이다.1832년 고대도에 `첫발을 디뎠던' 귀츨라프 목사나 1866년 평양 대동강변의 토마스 목사,1884년에 들어온 `상주 의료선교사' 알렌 등이 모두 1885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1885년을 선교의 시작으로 보기 힘든 이유는 이때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밖으로부터의 선교' 행적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안에서부터 받아들인 선교'의 자국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첫 세례자가 있던 때나 소래에서 첫 신앙공동체(교회)가 세워진 때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선교는 선교사들의 교육사업, 의료사업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그것은 외적인 것이고 내적인 것은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과 믿음으로 가지려는 자발적인 종교심 그리고 소그룹 공동체 등 부흥을 위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기초적인 토대도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선교사들 조차도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지금과 같은 조직을 갖춘 교회 공동체의 설립은 선교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제하에서 일본은 미국이나 영국의 선교사들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된 교회는 선교에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선교지 분할 정책인 네비우스 정책을 통해 한국 선교사 역할 분담되어 더 효과적으로 진행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교사들 과다한 경쟁을 불식시키고 서로 협력하는 선교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선교는 성경번역, 소그룹 공동체, 열정적인 종교심 그리고 복음적인 선교사들의 교육, 의료사업과 고아원 등 사회사업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보아진다.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5.11.10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966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