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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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임진왜란(난중의 사회상)

임진왜란 이야기

왜 하필이면 임진왜란인가?

조선군은 왜 그리 무기력했는가

적을 몰랐다

도움이 되지 않은 명나라

얼레빗? 참빗?

당시 사대부들의 \'숭명사상\'

조선을 위해 싸운 일본인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임진왜란에 참전한 포르투갈인

본문내용

문물에 대한 숭배' 때문이었습니다.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도리상 옳지 않다고 김충선은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실지도 모르지만 김충선은 무장으로서 전쟁에 참가 했으나 겉만 일본인 이었을 뿐 속은 조선의 모화주의자 처럼 유교적 관념에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김충선이 한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명나라가 우리를 도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며, 금수와 같은 오랑캐를 어찌 섬길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가 이제 끊어졌구나!"
1992년에는 김충선의 귀화 400년을 기념하는 비가 그 후손들이 살았던 대구근방의 집성촌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대구에는 '대명동'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이 지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에 의해 붙여진 것입니다. 두사충은 이여송의 참모로서 조선에 와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나자 귀화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에게 대구 시내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해 주었고 그 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습니다.
그리고는 고향을 그리며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전쟁에서 공까지 세운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것은 조선의 풍수에 매료된 탓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포르투갈인
임진왜란 중 여진족의 건주위 추장이나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는 부모의 나라를 돕겠다며 3만명의 군사를 파견하겠다는 요청을 조선에 해왔습니다. 야심만만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을 여진족 부흥의 기회로 본 것이었지만 조선은 자존심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신부를 통해 보낸 서한에서 포르투갈 국왕에게 함포가 장착된 군함 2척을 빌려 조선을 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적이 달성될 경우 천주교를 조선과 중국에 포교하도록 도와주겠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지만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 남쪽에서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인들은 오히려 흑인들을(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터라 흑인이 많았습니다.)용병으로 명군에 참전시켰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선조가 명나라 장수 팽신고가 데리고 온 신병(神兵)을 만났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외모에 대해서는 '파랑국(波浪國 : 포르투갈의 음차표기)에서 온 사람으로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오랜 시간 물에서 생활할 수 있으며 중원 사람도 보기가 쉽지 않다.'고 명나라 장수 진유격의 말을 빌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포르투갈에서 발견된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쓴 '일본사'에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 병사가 명나라 용병으로 잠수병을 파견해 조선에서 싸웠다는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 2000년 2월 6일 보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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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24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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