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빌라노바와 에트루리아...
- 빌라노바의 미술...
- 에트루리아의 미술...
- 에트루리아의 건축...
- 에트루리아의 조각...
- 에트루리아의 회화...
- 에트루리아의 청동공예...
- 에트루리아 미술 결론...
- 빌라노바의 미술...
- 에트루리아의 미술...
- 에트루리아의 건축...
- 에트루리아의 조각...
- 에트루리아의 회화...
- 에트루리아의 청동공예...
- 에트루리아 미술 결론...
본문내용
ait of Vel Saties
시대가 내려오면 괴기한 주제를 취급한 타르퀴니아의 '귀신의 묘-Tomb Of The Demons'-그림17 등의 벽화가 나타나 에트루리아인의 마음에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의 예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아마도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포강
그림 17 귀신의 묘-Tomb Of The Demons
유역으로 진출하였던 북방 갈리아인 으로부터의 영향으로 보인다.
Francois Tomb BC 350~330
그림 19 The Giglioli Tomb
그림 20 Tomb of The Charuns
또 다른 에트루리아의 마을인 불치(Vulei)에 있는 4세기경의 무덤 하나는 발견자자인 화가, 알레산드로 프랑수아(Alessandro Francois)의 이름을 따라서 프랑수아의 무덤으로 불린다. 이 무덤은 벨 사티에스라는 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벽화에서 무희들의 형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긴 예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그림 18). 오른편에 있는 조그마한 인물은 주인공이 동반한 난쟁이로서, 아마도 하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 난쟁이는 왼손에 가죽 끈으로 묶은 새 한 마리를 들고 있다.
그 밖의 비슷한 시기의 무덥 벽화로는 The Giglioli Tomb BC 300(그림 19), Tomb of The Charuns BC 300(그림 20), 방패의 묘-Tomb of The Shields BC 280(그림 21)등이 있다.
그림 21 방패의 묘-Tomb of The Shields
그림 22 뱀의 다리를 가진
거인 티폰
Tomb of The Typhon BC 150
타르퀴니아에 있는 '티폰의 무덤-Tomb of The Typhon'은 앞서 본 무덤들보다 더 후대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그 연대가 추정된다. 여기에는 뱀의 다리를 가진 날개 달린 인물(그림 22)과 하반신이 넝쿨 식물로 변한 여인들이 지붕을 떠받치는 카리아티드(caryatid, 여상주(女像柱): 여인의 형태를 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티폰은 페르가몬(Pergamon)에 있는 제우스 신의 제단에 묘사되어 있는 거인들 중 한 사람과 흡사하게 보인다. 이러한 소재들은 로마 회화에서는 순전히 장식적인 세부 요소로서 나중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청동 공예품들
그림 23 청동 거울
그림 24 라사가 새겨진 거울
보편적인 에트루리아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여인들을 위한 유물은 청동 거울로서 대부분 보석 세공품들과 함께 발견된다(그림 23). 이 원판들은 한쪽 면은 물체를 반사하도록 광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대부분 신화의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재현된 장면에는 명문이 따르게 마련인데, 에트루리아와 때에 따라서는 그리스에서 전해진 설화들이 - 이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가 여인들이나 여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그림 25 피코로니 키스타
헬레니즘 시대의 거울들에 나타나는 한 전형적인 소재는 목걸이와 귀걸이만을 착용한 나체의 여인으로서, 이 여인은 대부분 여신 라사(Lasa)를 재현한 것이다(그림 24). 도판에 나온 인물은 날카로운 도구로 만든 간결하지만 표현력 있는 선들로 그려졌다. 그녀는 알라바스트론(향수병)을 왼손에 든 채로 종 모양의 커다란 꽃 옆을 달려가고 있다. 예술가는 원형의 화면 형태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는데, 둥근 가장자리 선이 여신의 날개 형태와 잘 맞아 들어간다.
여인들은 거울을 키스타(cista)라고 하는 커다란 청동 화장 상자 안에 보관했다. 이러한 상자는 보통 겉면에 장식을 새기고 뚜껑 손잡이는 작은 인물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었다. 그 훌륭한 보기가 <피코로니 키스타>(기원전 350~300년)로, 피코로니라는 남자가 프라이네스테에서 발견한 것이다(그림 25). 이 상자의 몸통을 둘러싸고 아름답게 새겨진 그림은 아르고 호의 선원들의 모험담에 나오는 일화 중 하나를 재현한 것이다. 선원 중에는 천상의 쌍둥이 신인 카스트로와 폴룩스가 있었는데, 이들이 불사의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떤 지방의 호전적인 왕 아미코스가 폴룩스에게 권투로서 도전해 왔던 것이다. 이 시합에서 폴룩스가 이겼고 그와 다른 동료들은 아미코스를 나무에 결박했다.
이 음각화에는 화가 노비오스 플라우티오스의 서명이 들어 있는데 이 화가는 아마도 동시대의 그리스 화가 키디아스가 그린 아르고 호의 선원들의 그림을 대략적으로 축소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키디아스의 회화는 당시에 로마에 전시되어 있었던 듯한데 작가가 위의 작품을 로마에서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데에는 아마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현재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미술 작품들 가운데 두 번 혹은 세 번의 모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 원작에서 직접 도안을 복사한 흔치 않은 예이다.
에트루리아 미술의 특질, 결론
현재 모든 유럽이 올리브와 포도를 재배하는 것도 모두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전통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농업기술을 해상로로는 멀리 스페인과 이집트까지, 육로로는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마니아(독일)에까지 전해주었다. 에트루리아가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쯤 프랑스 와인은 맛 볼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농업뿐 아니라 이처럼 에트루리아가 서양사회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유럽의 많은 역사 교과서에서 이들의 이름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는 것도 그떠문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비록 정체불명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그리스 문명과 로마제국을 잇는, 너무나도 중요한 유럽의 뿌리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같은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사실을 누르고 전형적인 표현에 힘써온 그리스인의 미술취향과는 달리 소박하고 힘찬 사실에 철저하였으며, 그 특질을 로마인에게 전하여 구체성과 실증성을 중히 여긴 제정(帝政) 로마의 거대한 미술이 탄생하는 직접적인 동인(動因)이 되었다. 더욱이 에트루리아적 이탈리아적인 성격은 중세의 로마네스크 미술로 계승되었고, 14 15세기의 피렌체파 미술에 되살아났으며, 현대에도 M.마리니의 조각이나 캄필리의 회화 등에 영향을 주었다.
시대가 내려오면 괴기한 주제를 취급한 타르퀴니아의 '귀신의 묘-Tomb Of The Demons'-그림17 등의 벽화가 나타나 에트루리아인의 마음에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의 예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아마도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포강
그림 17 귀신의 묘-Tomb Of The Demons
유역으로 진출하였던 북방 갈리아인 으로부터의 영향으로 보인다.
Francois Tomb BC 350~330
그림 19 The Giglioli Tomb
그림 20 Tomb of The Charuns
또 다른 에트루리아의 마을인 불치(Vulei)에 있는 4세기경의 무덤 하나는 발견자자인 화가, 알레산드로 프랑수아(Alessandro Francois)의 이름을 따라서 프랑수아의 무덤으로 불린다. 이 무덤은 벨 사티에스라는 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그는 벽화에서 무희들의 형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긴 예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그림 18). 오른편에 있는 조그마한 인물은 주인공이 동반한 난쟁이로서, 아마도 하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 난쟁이는 왼손에 가죽 끈으로 묶은 새 한 마리를 들고 있다.
그 밖의 비슷한 시기의 무덥 벽화로는 The Giglioli Tomb BC 300(그림 19), Tomb of The Charuns BC 300(그림 20), 방패의 묘-Tomb of The Shields BC 280(그림 21)등이 있다.
그림 21 방패의 묘-Tomb of The Shields
그림 22 뱀의 다리를 가진
거인 티폰
Tomb of The Typhon BC 150
타르퀴니아에 있는 '티폰의 무덤-Tomb of The Typhon'은 앞서 본 무덤들보다 더 후대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그 연대가 추정된다. 여기에는 뱀의 다리를 가진 날개 달린 인물(그림 22)과 하반신이 넝쿨 식물로 변한 여인들이 지붕을 떠받치는 카리아티드(caryatid, 여상주(女像柱): 여인의 형태를 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티폰은 페르가몬(Pergamon)에 있는 제우스 신의 제단에 묘사되어 있는 거인들 중 한 사람과 흡사하게 보인다. 이러한 소재들은 로마 회화에서는 순전히 장식적인 세부 요소로서 나중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청동 공예품들
그림 23 청동 거울
그림 24 라사가 새겨진 거울
보편적인 에트루리아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여인들을 위한 유물은 청동 거울로서 대부분 보석 세공품들과 함께 발견된다(그림 23). 이 원판들은 한쪽 면은 물체를 반사하도록 광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대부분 신화의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재현된 장면에는 명문이 따르게 마련인데, 에트루리아와 때에 따라서는 그리스에서 전해진 설화들이 - 이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가 여인들이나 여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그림 25 피코로니 키스타
헬레니즘 시대의 거울들에 나타나는 한 전형적인 소재는 목걸이와 귀걸이만을 착용한 나체의 여인으로서, 이 여인은 대부분 여신 라사(Lasa)를 재현한 것이다(그림 24). 도판에 나온 인물은 날카로운 도구로 만든 간결하지만 표현력 있는 선들로 그려졌다. 그녀는 알라바스트론(향수병)을 왼손에 든 채로 종 모양의 커다란 꽃 옆을 달려가고 있다. 예술가는 원형의 화면 형태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는데, 둥근 가장자리 선이 여신의 날개 형태와 잘 맞아 들어간다.
여인들은 거울을 키스타(cista)라고 하는 커다란 청동 화장 상자 안에 보관했다. 이러한 상자는 보통 겉면에 장식을 새기고 뚜껑 손잡이는 작은 인물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었다. 그 훌륭한 보기가 <피코로니 키스타>(기원전 350~300년)로, 피코로니라는 남자가 프라이네스테에서 발견한 것이다(그림 25). 이 상자의 몸통을 둘러싸고 아름답게 새겨진 그림은 아르고 호의 선원들의 모험담에 나오는 일화 중 하나를 재현한 것이다. 선원 중에는 천상의 쌍둥이 신인 카스트로와 폴룩스가 있었는데, 이들이 불사의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떤 지방의 호전적인 왕 아미코스가 폴룩스에게 권투로서 도전해 왔던 것이다. 이 시합에서 폴룩스가 이겼고 그와 다른 동료들은 아미코스를 나무에 결박했다.
이 음각화에는 화가 노비오스 플라우티오스의 서명이 들어 있는데 이 화가는 아마도 동시대의 그리스 화가 키디아스가 그린 아르고 호의 선원들의 그림을 대략적으로 축소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키디아스의 회화는 당시에 로마에 전시되어 있었던 듯한데 작가가 위의 작품을 로마에서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데에는 아마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현재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미술 작품들 가운데 두 번 혹은 세 번의 모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 원작에서 직접 도안을 복사한 흔치 않은 예이다.
에트루리아 미술의 특질, 결론
현재 모든 유럽이 올리브와 포도를 재배하는 것도 모두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전통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농업기술을 해상로로는 멀리 스페인과 이집트까지, 육로로는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마니아(독일)에까지 전해주었다. 에트루리아가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쯤 프랑스 와인은 맛 볼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농업뿐 아니라 이처럼 에트루리아가 서양사회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유럽의 많은 역사 교과서에서 이들의 이름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는 것도 그떠문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비록 정체불명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그리스 문명과 로마제국을 잇는, 너무나도 중요한 유럽의 뿌리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같은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사실을 누르고 전형적인 표현에 힘써온 그리스인의 미술취향과는 달리 소박하고 힘찬 사실에 철저하였으며, 그 특질을 로마인에게 전하여 구체성과 실증성을 중히 여긴 제정(帝政) 로마의 거대한 미술이 탄생하는 직접적인 동인(動因)이 되었다. 더욱이 에트루리아적 이탈리아적인 성격은 중세의 로마네스크 미술로 계승되었고, 14 15세기의 피렌체파 미술에 되살아났으며, 현대에도 M.마리니의 조각이나 캄필리의 회화 등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