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용진 대흥리) 문화재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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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연혁
유래
문화재(10여가지)

본문내용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는 현판 옆에 도광(道光) 18년(1835:조선 헌종 1)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 연대는 그 이전일 것이 분명하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가운데에 돌계단을 만들었으며 정면 3칸은 모두 각각 세 짝의 문을 달았다. 이들 문짝 아래 부분에 궁판이 있고 문살 형식은 넉살무늬로 되어 있으며, 세 짝의 문은 처마 밑에 달아매게 만들어졌다. 가구(架構)는 높은 기둥을 사용한 고주(高柱)집 건축의 기본적인 7가량(架樑)이며 대들보는 우직한 느낌을 주나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리려 한 것 같다. 전주에서 26㎞ 거리에 자리잡은 위봉사는 백제 무왕5년(604년)에 서암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1912년에는 전국 사찰 30본사의 하나로 52개의 말사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보물 608호인 보광명전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69호인 요사와 삼성각만이 남아있다.
용계산성
종 목
문화재자료 175호
명 칭
용계산성
(龍溪山城)
분 류
성지(성곽)
수 량
일원(13,075㎡)
지정일
2000.12.29
소재지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 642외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
산림청외
관리자
완주군
이 산성은 천둥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를 돌로 에워싼 형태로서 둘레는 493m 정도이다. 성은 서쪽 골짜기를 따라 ㄷ자형으로 축성한 포곡식(包谷式)인데 험준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동벽은 능선을 따라 외벽만 쌓고, 다른 지역은 내외를 쌓은 협축(夾築)으로서 남벽의 성벽높이는 내벽 2.2m, 외벽 4m, 폭 4.3m 내외이다. 성벽의 남동쪽 모서리에는 우루대(隅樓臺)가 돌출되어 있으며, 서쪽에서는 수구지가 확인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고산고적조(高山古蹟條)’와 『문헌비고(文獻備考)』 ‘고산조(高山條)’에는 둘레 1,014척으로서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내부에는 건물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돗자리무늬가 찍힌 백제시대 기와 및 토기편들이 수습되었다
위봉산성
종 목
시도기념물 17호
명 칭
위봉산성
(威鳳山城)
분 류
성지(성곽)
수 량
일원
지정일
1974.09.24
소재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675
소유자
국유
관리자
완주군
전라북도 완주군의 이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7년의 세월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다.
유사시 전주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영정과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유사시에 보관하기 위하여 전주에서 가까운 험한 지형을 골라 성을 쌓았다. 실제 동학혁명으로 전주가 함락 되었을 때 초상화와 나무 패를 이곳으로 피난시킨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은 높이 4∼5m, 길이 16㎞로, 3개의 성문과 8개의 암문(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지금은 일부 성벽과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그 위에 높이 3m의 아치형 성문이 있다. 동문이 있던 자리 인근에는 위봉폭포가 있다.
성안에는 초상화와 위폐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헐려 없어졌다. 성의 동. 서. 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다. 성안에는 위봉사와 위봉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완주군 위봉산에는 길이 6.4km의 위봉산성이 있다. 송광사에 동북쪽으로 3Km쯤 가면 원래 외성이라 했다는 오성마을이 나오고 여기서 추줄산을 돌고 돌아 1.5Km쯤 오르면 폐허 상태에서 흔적만 남아 있는 위봉산성의 서문에 다다른다. 다행인 것은 문 위에 있었다는 3칸의 문주는 자취를 감췄지만 높이 3m 폭 3m의 홍예석문이 지방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점이다. 이 산성은 1675년 7년의 세월 동안 인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국토방위라는 목적보다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다.
고종 32년에 산성을 폐지하였으며,1944년 9월 폭풍우로 말미암아 헹궁은 허물어져 없어짐.
태조암
태조 영정을 모신 것을 봉축하기 위하여 산성 밖에 태조암(太祖菴)을 세웠다고 한다. 그 절의 비구니 말에 따르면, 6.25 이후 절을 장기간 비워놔서 절의 자세한 내력과 역사는 모르지만 태조 이성계가 왔다가서 태조암이라는 이름이 붙어 진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태조암에는 현재 다섯 폭의 천불탱화(千佛幀畵)를 보관하고 있는데 그 수법이 정교하고 뒷면에는 붉은 글씨의 범문(梵文)이 쓰여져 있다.
전주한지
전주한지라고도 불리우는 송광한지는 대흥리 송광마을에서 생산되고 있다. 전주한지 속에 송광장판지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산업화의 물결속에 전통한지는 퇴색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명덕암(굿당)
점이 굿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남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고 그를 통해 예방하던 무속의 본래적인 기능은 없고 오직 굿에 승부를 거는 무당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굿을 전문으로 하는 무당들을 청배만신이라고 한다. 굿을 전문적으로 하는 굿당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굿당은 보통 개인신당보다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큰 것은 아니고 방 서너 칸 크기에서부터 몇 개의 독채로 된 굿당 등 다양한 모습을 갖춘다.
소감
우리 고장에 이름난 문화재를 가보더라도 그냥 대충 사진만 찍고 둘러보기만 했던 것이 전부 였던 거 같다. 이름난 문화재를 가보다 보니 쉽게 찾을 수 있었고 그로인해 문화재의 귀중함을 소홀히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레포트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도 직접 찾아다니고 조사를 하는 것이 여서 더 남달랐다. 조사 지역 주민도 알지 못했던 문화재를 찾았을 때, 그 기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을 가기 위해 가파른 산길을 30분 이상 올라가서 직접 문화재를 보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는 귀중한 보물을 발견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차를 타고 지역을 둘러보면서 혹시나 유적이 있지 않을까 두리번 거리면서 무심코 흘렸던 자연을 둘러보면서 초여름을 느끼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비록 힘든 조사였지만 그만큼 내가 많이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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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5.12.18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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