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서부지방의 도시화 문제
Ⅲ. 반혁명의 원인
1. 농촌경제와 지방공동체
2. 종교의 영향
Ⅳ. 반혁명의 발발
1. 방데(Vendee)지방의 반혁명 운동
2. 슈왕(Chouans)의 활동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Ⅱ. 서부지방의 도시화 문제
Ⅲ. 반혁명의 원인
1. 농촌경제와 지방공동체
2. 종교의 영향
Ⅳ. 반혁명의 발발
1. 방데(Vendee)지방의 반혁명 운동
2. 슈왕(Chouans)의 활동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본문내용
민들의 봉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이 스스로 이들의 지도자가 되기로 자청하였다. 따라서 귀족인 엘베, 레스뀌르, 로쉬쟈끌랭이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었고 선서거부성직자인 베르니에 신부도 농민군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까뜰리노와 스또플레 까뜰리노는 모쥬지방의 짐마차 꾼이었고, 스또플레는 사냥터지기였다.
같은 농촌출신도 스스로 방데반란기간의 뛰어난 지도자가 되었다.
방데반란은 몇 개의 중요한 기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793년 3월~5월까지로서 방데반란은 아마도 이것으로서 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5월 31일과 6월 1일 사이에 파리에서 지롱드파가 의회로부터 축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롱드파는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던 집단으로써 지롱드파의 몰락은 프랑스 전체에 연방주의 반동을 가져오게 되었고 특히 서부지역에서 연방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방데반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5월 31일에서 6월 2l일에 시작된 것이 방데반란의 제2기로서 1795년 평정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이 기간은 다시 두개의 단계로 나뉘어 지는데 대접전의 시기와 슈왕의 활동으로 구분 할 수 있다.
1. 방데지방의 반혁명 운동
3월 12일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몇몇 중요지역인 르와르 좌안과 방데. 노르망디. 브리타니지방을 포위하였다. 농민들은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상태였고 귀족과 성직자, 일부 농민들에 의해서 이끌어지게 되었다. 반란은 일어나자 곧 방데 동부해안에 위치한 마쉐(Marches)지역으로 파급되어 4월 6일에 지도자들은 마쉐지역 도시를 점령하고 영국과 스페인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서부지방 반혁명 노력이 외국군대와 접촉을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 반란은 모제(Mauges)지역과 더 동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생플로랑르비예이으가 귀족인 엘베와 봉샹 그리고 스또플레와 까뜰리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서 점령되었고 3월 15일에는 소뮈르로 진격하여 점령하였으나 숄레(Cholet)에서는 반격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거의 무적이었던 반란군은 부활절주일이 되자 농민들이 휴일을 보내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고 그리하여 반란군은 흩어졌다. 이것이 방데반란이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농민들은 교구로부터 멀리 나간다거나 밭은 미경작 상태로 방치해 두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게다가 행정관리는 문란하였고 각자 자기가 먹을 식량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던 농민들은 식량을 모두 소비하여 군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동성이 뛰어났고 흩어지고 모이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혁명당국은 첫 번째 반란 소식을 들은 후에 무기를 가진 채 사로잡힌 반란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라는 명령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발견되어 체포된 사람들도 모두 감옥에 보내어졌다. 다시 새로운 방데반란군 2만 명이 로쉬쟈끌랭휘하에 조직되었으나 혁명당국에 의해서 패퇴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반란군은 소멸하지 않고 모제지방의 남쪽에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방데반란의 두 번째 국면은 파리에서 지롱드 당이 숙청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지롱드당이 숙청되었다는 소식이 지방에 전해지자 지롱드파 관리들은 이 사실을 기정사실화 하지 않고 혁명당국에 대하여 자신들의 분리를 결정하였다. 5월에 브르따뉴, 노르망디, 남서지방과 남부지방, 프랑슈꽁데가 분리를 선언했고 6월말경에는 약 60개의 현이 반란상태에 들어갔다.
지롱드당원들은 새로운 혁명의 지도세력이 된 산악당원 산악당원들도 부르조아지의 이익을 대변하였지만 지롱드당보다 무산자에 가까웠고 지롱드당 숙청을 통해 파리에 산악당원들이 등장하게 된다.
들에 대하여 저항을 하였다. 지롱드당원들은 열렬한 공화주의자들이었지만 계급적인 이익이 더 앞서게 된 것이었다. 지롱드당에 의한 연방주의자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를 계기로 서부지방에서 반혁명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방데반란군은 재조직된지 한달 반만에 혁명군에 의해서 고립되었지만 6주일이나 버티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조직은 만들었다. 즉 베르니에 주교와 레스뀌르후작이 연합하며 「캐톨릭 왕당군대(The Catholic and Royal army)」를 탄생시키고 까뜰리노를 지도자로 맞아들였으며 점령지역에서 십일조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농민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농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해 분열의 씨를 안게 되었다. 또 이들 역시 잘 무장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급습한 도시에서 무기, 대포 그리고 장비를 획득해야만 했다.
혁명군은 반란군과의 교전을 위해 두개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하나는 깡끌로가 지휘하는 꼬뜨 드 브레스뜨(cote de Brest)군이고 다른 하나는 비롱이 지휘하는 꼬뜨 드 라로쉘(cote de Rochelle)군이었다. 깡끌로가 지휘하는 브레스뜨 해안군은 르와르 북쪽에, 비롱의 라로쉘 해안군은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 공화국 정규군인 웨스떼르망과 쌍떼르는 각각 7월 5일과 13일에 방데 반란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였다. 반란군은 소뮈르를 근거지로 삼고 르와르강 오른쪽을 따라 낭뜨르 행군하기로 결정하고 한 부대는 6월 18일에 앙제를 점령하고 다른 부대는 낭뜨에 도착하였다. 낭뜨에는 깡끌로와 베이세가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낭뜨 공격에서 「카톨릭 왕당군」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어 까뜰리노가 죽자, 엘베가 새로운 총지취관 스또플레가 부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두명, 봉샹과 샤레트(Charette)가 이에 불만을 품어서 반란군은 또다른 분열의 씨를 갖게 되었다. 낭뜨에서의 패전이후 방데군은 사블돌론느로 나아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9월 1일에 의회는 방데에 대해 전면전을 선언하였다. 10월 17일 혁명군과 방데반란군이 숄례에서 부딪쳤는데 방데반란군이 패하였다. 이곳에서 엘베. 봉샹. 레스뀌르가 사망하거나 부상하였고 방데군의 나머지는 르와르를 향하여 퇴각하였다. 엘베가 죽자 로쉬쟈글랭과 스또플레가 사령관이 되었다. 르와르에서 반란군은 앞으로의 사태에 대하여 주저하였다. 서쪽으로 돌아가서 샤레뜨와 만난 다음 해안방어선 수립할 것인가, 아니면 르와르강을 건너서 북쪽을 햐
같은 농촌출신도 스스로 방데반란기간의 뛰어난 지도자가 되었다.
방데반란은 몇 개의 중요한 기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793년 3월~5월까지로서 방데반란은 아마도 이것으로서 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5월 31일과 6월 1일 사이에 파리에서 지롱드파가 의회로부터 축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롱드파는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던 집단으로써 지롱드파의 몰락은 프랑스 전체에 연방주의 반동을 가져오게 되었고 특히 서부지역에서 연방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방데반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5월 31일에서 6월 2l일에 시작된 것이 방데반란의 제2기로서 1795년 평정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이 기간은 다시 두개의 단계로 나뉘어 지는데 대접전의 시기와 슈왕의 활동으로 구분 할 수 있다.
1. 방데지방의 반혁명 운동
3월 12일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몇몇 중요지역인 르와르 좌안과 방데. 노르망디. 브리타니지방을 포위하였다. 농민들은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상태였고 귀족과 성직자, 일부 농민들에 의해서 이끌어지게 되었다. 반란은 일어나자 곧 방데 동부해안에 위치한 마쉐(Marches)지역으로 파급되어 4월 6일에 지도자들은 마쉐지역 도시를 점령하고 영국과 스페인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서부지방 반혁명 노력이 외국군대와 접촉을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 반란은 모제(Mauges)지역과 더 동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생플로랑르비예이으가 귀족인 엘베와 봉샹 그리고 스또플레와 까뜰리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서 점령되었고 3월 15일에는 소뮈르로 진격하여 점령하였으나 숄레(Cholet)에서는 반격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거의 무적이었던 반란군은 부활절주일이 되자 농민들이 휴일을 보내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고 그리하여 반란군은 흩어졌다. 이것이 방데반란이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농민들은 교구로부터 멀리 나간다거나 밭은 미경작 상태로 방치해 두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게다가 행정관리는 문란하였고 각자 자기가 먹을 식량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던 농민들은 식량을 모두 소비하여 군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동성이 뛰어났고 흩어지고 모이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혁명당국은 첫 번째 반란 소식을 들은 후에 무기를 가진 채 사로잡힌 반란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라는 명령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발견되어 체포된 사람들도 모두 감옥에 보내어졌다. 다시 새로운 방데반란군 2만 명이 로쉬쟈끌랭휘하에 조직되었으나 혁명당국에 의해서 패퇴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반란군은 소멸하지 않고 모제지방의 남쪽에 강력하게 남아있었다.
방데반란의 두 번째 국면은 파리에서 지롱드 당이 숙청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지롱드당이 숙청되었다는 소식이 지방에 전해지자 지롱드파 관리들은 이 사실을 기정사실화 하지 않고 혁명당국에 대하여 자신들의 분리를 결정하였다. 5월에 브르따뉴, 노르망디, 남서지방과 남부지방, 프랑슈꽁데가 분리를 선언했고 6월말경에는 약 60개의 현이 반란상태에 들어갔다.
지롱드당원들은 새로운 혁명의 지도세력이 된 산악당원 산악당원들도 부르조아지의 이익을 대변하였지만 지롱드당보다 무산자에 가까웠고 지롱드당 숙청을 통해 파리에 산악당원들이 등장하게 된다.
들에 대하여 저항을 하였다. 지롱드당원들은 열렬한 공화주의자들이었지만 계급적인 이익이 더 앞서게 된 것이었다. 지롱드당에 의한 연방주의자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를 계기로 서부지방에서 반혁명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방데반란군은 재조직된지 한달 반만에 혁명군에 의해서 고립되었지만 6주일이나 버티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조직은 만들었다. 즉 베르니에 주교와 레스뀌르후작이 연합하며 「캐톨릭 왕당군대(The Catholic and Royal army)」를 탄생시키고 까뜰리노를 지도자로 맞아들였으며 점령지역에서 십일조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농민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농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해 분열의 씨를 안게 되었다. 또 이들 역시 잘 무장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급습한 도시에서 무기, 대포 그리고 장비를 획득해야만 했다.
혁명군은 반란군과의 교전을 위해 두개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하나는 깡끌로가 지휘하는 꼬뜨 드 브레스뜨(cote de Brest)군이고 다른 하나는 비롱이 지휘하는 꼬뜨 드 라로쉘(cote de Rochelle)군이었다. 깡끌로가 지휘하는 브레스뜨 해안군은 르와르 북쪽에, 비롱의 라로쉘 해안군은 남쪽에 주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 공화국 정규군인 웨스떼르망과 쌍떼르는 각각 7월 5일과 13일에 방데 반란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였다. 반란군은 소뮈르를 근거지로 삼고 르와르강 오른쪽을 따라 낭뜨르 행군하기로 결정하고 한 부대는 6월 18일에 앙제를 점령하고 다른 부대는 낭뜨에 도착하였다. 낭뜨에는 깡끌로와 베이세가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낭뜨 공격에서 「카톨릭 왕당군」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어 까뜰리노가 죽자, 엘베가 새로운 총지취관 스또플레가 부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두명, 봉샹과 샤레트(Charette)가 이에 불만을 품어서 반란군은 또다른 분열의 씨를 갖게 되었다. 낭뜨에서의 패전이후 방데군은 사블돌론느로 나아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9월 1일에 의회는 방데에 대해 전면전을 선언하였다. 10월 17일 혁명군과 방데반란군이 숄례에서 부딪쳤는데 방데반란군이 패하였다. 이곳에서 엘베. 봉샹. 레스뀌르가 사망하거나 부상하였고 방데군의 나머지는 르와르를 향하여 퇴각하였다. 엘베가 죽자 로쉬쟈글랭과 스또플레가 사령관이 되었다. 르와르에서 반란군은 앞으로의 사태에 대하여 주저하였다. 서쪽으로 돌아가서 샤레뜨와 만난 다음 해안방어선 수립할 것인가, 아니면 르와르강을 건너서 북쪽을 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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