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빗물이용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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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한국사회의 ‘비’관련 문화전통

II. 전통사회의 비 기원제 : 기우제

III. 빗물활용의 적극적 노력 :제언(堤堰) 보(洑)축조

IV. 빗물이용의 다양한 사례

V. 측우기관련 사료 및 내용

VI. 빗물이용문화의 현대적 계승방안

본문내용

측우기의 규격을 약간 줄여서 깊이 약 31㎝, 지름 약 14㎝로 하였다. 그 까닭은 실제로 사용해보니까 깊이 약 41㎝에 빗물이 많이 차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를 꽂아 빗물의 깊이를 재기에는 너무 깊어서 불편하였고, 또 측정한 뒤에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측우대에 안치(安置)할 때 너무 무거워서 취급하는 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1910년경에 확인된 측우기는 4기(器)로 모두 황동제였다. 그 하나는 경복궁 내의 관상감에서 쓰던 것으로 깊이 306㎜, 안지름 147㎜이었고, 둘째는 대구의 선화당(宣化堂)에 있던 것으로 깊이 217㎜, 안지름 147㎜, 셋째는 함흥에 있던 것으로 깊이 293㎜, 안지름 145㎜이다. 넷째는 공주에 있던 금영측우기로 이것만은 특이하게 세 부분의 조립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지름은 140㎜, 조립할 때의 깊이는 315㎜이지만 상·중·하단 각각의 깊이는 106㎜·105㎜·103㎜이고 조립할 때 겹쳐지는 부분이 3㎜이며, 전체의 무게는 6.2㎏이다. 그런데 관상감측우기는 국권상실 무렵에 없어졌고, 함흥측우기와 선화당측우기는 한국전쟁 중에 모두 없어졌다. 금영측우기와 주척은 1915년경 와다(和田雄治)가 일본으로 가져가서 일본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을 1971년에 돌려 받았으나 주척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현재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측우기는 이탈리아 갈릴레이(Galilei, G.)의 온도계 발명(1592년)이나 토리첼리(Torricelli, E.)의 수은기압계 발명(1643년)보다 훨씬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관측장비였다. 유럽에서는 1639 년에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했다. 프랑스의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관측하였으니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앞선 것이다. 따라서 측우기는 세계기상학사에서 관천망기시대(觀天望氣時代)에 뒤따르는 측기시대(測器時代)를 약 150년 정도 앞당긴 것이었다.
<관련사료>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우량(雨量)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오니, 토성(土性)의 조습(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천심(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뒤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본관(本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촌·분수를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천심을 측량하여 본조(本曹)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또 외방(外方) 각 고을에도 경중(京中)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傳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권93 세종23년 8월 18일(임오)
한편, 조선시대의 측우기록인 『풍운기(風雲記)』를 보면 비오는 모양의 강약까지 8단계로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다. 즉, 미우(微雨), 세우(細雨), 소우(小雨), 하우(下雨), 쇄우(灑雨), 취우(驟雨), 대우(大雨), 폭우(暴雨) 가 그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각도로 하여금 비가 땅 속 어느 만큼 스몄는가 하는 것까지 측정하여 농정을 베풀도록 했다. 또 홍수에 대비하여 강물마다 수표(水標)를 세워 수심을 측정하고 폭우가 내리 면 강물의 유속을 재어 봉화대로 그 속도를 알려줌으로써 하류지역의 피해를 줄이도록 했다.
VI. 빗물이용문화의 현대적 계승방안
제언과 보 축조의 경우 가을, 겨울의 강우, 강설을 최대한 확보하여 봄 경작시 활용을 목적한 것이다. 제언 축조시 문제는 큰 규모의 제언이나 보 건설시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점과 제언주변의 농토가 다수 흡수되어 양질의 토지결손이 많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수령(守令)이 제언(堤堰)을 만들 만한 곳을 찾아 물어도 백성들이 모두 숨기고 고하지 않는 것은, 그 기름진 전지가 손실되고 끝내 그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조실록』 권9 세조3년 9월24일(을유)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소규모 방죽을 기존 농토주변에 다수 설치하여 해결하는 방안 등이 병행되었다.
이 같은 사실에서 부각되는 점은 전체 수자원이용이란 측면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댐 건설이란 방안에서 파생되는 문제가 유사하게 전통사회에서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수몰되는 지역과 수몰되지 않는 지역민의 갈등, 수몰지역의 경제적 가치소멸, 환경파괴문제 등이 당시에도 규모와 성격은 다르지만 노정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소방죽형식의 수자원이용 특히, 소규모 빗물저장 및 이용은 당시에도 현실적이었지만 현재에도 매우 유용한 방안으로 제안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소방죽 구축은 대규모 제언을 구축할 수 없는 지형이나 비용 및 기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빗물을 최대한 확보하여 활용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내용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즉, 대규모 계획된 신도시, 아파트단지 및 업무용 빌딩 등이 건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구조물, 단지 등을 소방죽 개념으로 설정하여 빗물의 중수적 이용방안 모색은 물 부족이 현실화된 현 시점에서 매우 유용한 방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빗물의 지역별, 단위별 사용방안 모색은 선인들의 현실적 문제해결 지혜가 그대로 귀감이 되어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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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6.01.20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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