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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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법성게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한다"는 것은 계위에 따라 각각 연기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과 다의 상입상즉을 밝히 구절 즉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하나의 개체는 각 개체 안에 일체의 요소를 각기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서로 연에 의하여 성립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과 일체는 서로를 포용하여 장애됨이 없다. 이렇게 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계에서는 독립된 자성을 가지는 고정불변의 개체는 있을 수 없고, 모든 개체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연기의 세계이다.
이러한 의상의 설명의 근원은 몇몇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의상은 지엄이 <법성게>구절에 근거하여 토대를 세운 일과 다의 상입상즉의 논리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법계연기의 핵심으로 집약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의의는 신라 교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새롭게 정립된 고도의 교학체계인 화엄사상이 의상에 의해 신라에 소개되었을 때, 그에 대해 가졌을 신선한 기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원효가 의상의 수십전설 등의 학설을 수용하여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이루어 나간 것이 그런 현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기 신라 불교가 지향하던 새로운 단계의 신라 불교철학을 성립시킨다는 과제에 대해, 의상이 제시한 화엄사상체계는 하나의 뚜렷한 성과였다. 이는 원효의 방대한 불교사상체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고, 이후 전개되는 신라 교학의 왕성한 연구 분위기의 문호를 여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의상이 통일기 신라불교에서 차지하는 사상적 위치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사상의 사회적 의의를 고찰하는 데는 그러한 순수사상을 실제 사회 속에서 받아들일 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즉 의상이 전개시킨 종교적 진리를 당시 신라 사회라는 세속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의상이 본래 이 논지를 열어간 것은 순수한 불교사상의 연마라는 관점에서였겠지만, 그가 이 사상을 신라 땅에서 여러 문도들에게 강의하여 전파시킬 때는 현실적 처지도 어느 정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상을 전개해 간 인물 스스로의 언설에서 명확한 사회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대단히 제한된 이 시기의 자료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 대신 사상을 직접 사회의식으로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 사상가가 보인 행적을 통해서 위와 같은 의미를 추구해 볼 수 있다.
의상은 어느 때 삼천의 청중들에게 화엄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수천 명의 대중들에게 화엄사상을 강의할 때 의상은 일반 대중이 어떤 의식에서 화엄사상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또 그는 문도와 함께 황복사에서 탑돌이를 하면서 계단을 딛고 오르지 않고 허공을 걸어 올라 탑을 돌면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여길 것이므로 세상에 가르치기는 어렵다고 하였던 적도 있다. 탑돌이를 하면서 허공을 딛고 올랐다는 것은 화엄사상의 고도의 철학체계가 여타 교학보다 높은 수준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것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정을 반영하는 설화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상의 행동과 그의 화엄사상과를 연결지어 생각해 보자.
一과 多가 서로 똑같은 단계에서 서로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될 수 있다는 연기의 논리는 개체간의 절대 평등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전체 속에서 독단적으로 두드러지는 이질적인 존재는 상호관계를 형성하는 데 지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相入相卽의 연기설 자체는 전체 구성원의 평등과 조화를 상징하는 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연기설을 가지고 一을 절대자인 국왕에 비유하고 多를 국가의 일반민 전체에게 비정하여 국왕에게 모든 힘이 모아진다는 이론으로 연결시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의상은 국가의 일정한 지원에 힘입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단을 이루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는 사회적 평등의 주장이 당시 신라의 강인한 골품제 사회 속에 쉽게 파고들기 어렵다는 것도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황복사 탑돌이 설화는 이런 의상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의상은 화엄의 상입상즉의 이론을 곧 그대로 사회 평등의 이념으로 적용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상 자신은 귀족 출신이었으면서도 의상의 제자 중에는 기층민 출신의 승려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의상의 제자 중에서 중심적인 십성에 올라 있는 진정은 본래 군인이었는데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연명할 만큼 가난한 기층민 출신이었다. 또 지통은 귀족가의 노비 출신으로서 의상 교단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의상은 또 국왕이 그에게 주는 전장과 노비를 사양하였다. 이처럼 국왕으로부터 권유를 받으면서도 그와 일정한 간격을 두는 데에 의상이 지향하던 사회적 성향이 있다고 하겠다. 이는 문무왕으로부터 국사의 고명을 받아 신문왕대에 국노가 되었던 경흥이 말을 타고 가죽신을 신은 화려한 차림 때문에 지탄받던 것과 좋은 대비를 보이는 행동이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은 의상의 화엄사상의 기본 바탕은 중도사상이라는 것이다. 의상이 법성게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연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제법은 연을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어느 하나도 일정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자재롭지 못하고, 생과 부생에 두루 통하여 일정하게 머무름이 없는 중도의 뜻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의상은 상입상즉의 화엄이론을 중도의 뜻으로 파악한 것이다.
의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화엄사상 자체가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제를 뛰어넘을 수 없는 세속적 한계성을 고려하여 그가 말하던 화엄교단 내에서 화엄사상을 화합을 구현하는 사회의식으로 내걸고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화엄사상의 실천성에 바탕을 두고, 사상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는 신앙을 그 실천 행동으로 선택하고는, 당시 신라 사회 전반에서 무르익어 가던 관음과 신앙체계를 화엄경설을 바탕으로 정립하여 광범위하게 실행해 나가게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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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6.01.19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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