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인쇄직공 총파업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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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노우회와 인쇄직공조합

2)총파업투쟁의 전개

3) 총파업투쟁의 한계와 의의

본문내용

량과 동업조합의 효율적 파업깨기꾼 동원이었다. 그럼에도 직공조합은 장기전에 응당 예상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다. 축적된 파업자금도 없었고 파업깨기꾼의 동원, 이탈자 발생, 경찰의 탄압을 저지할 조직적 규찰, 자위적 무장활동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애초에 이 파업을 비타협적인 장기전으로 이끌고 갈 각오가 서 있지도 않았다.
1기에 지도부는 이 파업을 부산지역 인쇄노동자들의 생존권적 문제로 애써 그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는 저자세를 보였고, 노동자 대중의 자각이나 투쟁력을 경시하고 협상과 조정에 매달리는 개량주의적 타협노선을 취했다. 타협을 얻어내기 위한 이러한 저자세는 투쟁의 주도권을 동업조합측에 헌납하고 스스로를자승자박에 빠뜨렸다. 그러한 타협노선으로는 파업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설사 부분적인 양보를 값싸게 얻어낸다 해도 곧바로 자본가측의 반격에 부딪혀 선진적 인자는 해고당하고 협약도 파기 당하고 만다는 것은 같은 해의 서울전차승무원파업이나 서울대동인쇄소파업에서 이미 확인된 것이었다.
셋째, 직공조합 고문으로 앉아있던 김근호(金根浩)의 개량주의적 태도와 무책임한 이탈이었다. 그는 협상과 조정을 통해 동업조합측으로부터 약간의 양보를 얻어내어 자신의 위신과 영향력을 높이려다 동업조합측에 고소를 당하자 꽁무니를 빼 버림으로써 파업대열 내에 동요와 이탈을 가져오게 했다.
넷째, 민족간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다.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일인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으며 일인 자본가들은 일본 내의 자본과도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인 노동자와 연대할 필요성이 컸다. 1926년 현재 인쇄업 종업자 수는 조선인 212명, 일본인 58명이었다. 그러나 이들 일인 노동자들을 투쟁에 끌어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한달여의 장기전을 벌였으며 그 결과 부분적 승리를 얻어내었다. 이러한 강인한 투쟁이 가능했던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무엇보다 먼저 노동자 대중의 불굴의 투쟁성과 동지애를 들어야 할 것이다. 직공들은 극심한 생계 위협, 가족을 동원한 회유 속에서도 경찰의 복업 강압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밥 한 그릇으로 십여 명이 나누어 먹는다고 할 정도의 식량난 속에서 직공조합에서는 각지에서 들어온 동정금으로 극빈자와 유년 직공의 가정에 쌀을 나누어주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이가 다른 동료들에게 주라며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한다.
둘째, 처음부터 직공조합이라는 전투적 대중단체에 의해 준비되고 지도되었다. 당시 부산인공조합은 정연한 조직과 강고한 단결력으로전 조선을 통해서도 몇 개 유수한 우질 단체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공조합은이 조합원이 파업을 결행하면 곧 전 부산의 인쇄업이 일시에 정지되는 형편에 이를 만큼 조직률이 매우 높았다. 인공조합은 그 동안 시기상조의 파업결행론을 억제하면서 조직력의 확대와 전투력의 강화에 주력해오다가 앞선 투쟁경험을 검토하고 적절한 시기를 선택하여 파업투쟁을 결행했다. 그 지도부는 파업투쟁의 제 1기에 협상과 조정에 매달리는 저자세를 보였으나 2기에 들어 대중의 자발적인 전투성에 기반을 둔 지도로 복직파 간부를 제명하고 대오를 재정비하여 파업투쟁을 장기항전으로 이끌었다.
셋째, 전국각지의 동지단체로부터 답지한 열렬한 성원이었다. 그것은 격전, 격문, 동업조합에 대한 경고문 발송, 동정금 송금, 위문위원 파견 등의 형태였는데 11월 29일까지 직공조합에 전달된 격전, 격문은 52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후원은 12월 말까지 이어져 장기전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파업투쟁의 의의를 살펴보자.
첫째, 지구성, 강인성에서 특출하였으며 또한 그것이 높은 조직성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었던 점에서 당시 우리나라 노동, 농민운동에 모범을 구현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 파업투쟁이 1925년 12월에서 이듬해 4월에 걸쳐 전개된 목표제유공장노동자 250명의 파업투쟁과 더불어 20년대 전반기의 파업투쟁이 가졌던 약점 - 대부분 단기간 파업이었으며 타협이 빈번했고 자생적 경제투쟁에 머물렀으며 노조에 의해 준비, 지도되지 않은 쟁의의 수가 많았다 -을 극복해냈음을 가리킨다.
둘째, 물론 이 파업투쟁은 다이나 상급조직의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며 자생적인 것에서 목적의식적인 것으로 전환하는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인공조합이라는 조직 속에 결합되어 있었고 그 조직에 의해 준비, 지도되어 전진적 내용의 제도개선투쟁을 한달여의 강인한 장기전으로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당시순정한 계급적 대립의 실(實)을 보이는 것은 매우 유의할 현상이라고 했듯이 이 파업은 계급투쟁적 성격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일제자본과 경찰은 이 파업투쟁의 이러한 성격에 주목했으며 따라서 치안적 차원에서 고압적, 노골적 탄압에 나섰다. 곧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의 매개고리인 인공조합을 무력화하려고 책동하였다.
셋째, 파업투쟁이 1기에서 2기로 전환한 것이 갖는 의미는 심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타협적 민족자본가, 행세식 사회주의자의 배신에 대한 응징의 선언이자 노동자계급의 내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민족자본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 획득의 징표였다.
넷째, 이 파업투쟁은 부산지역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 파업투쟁과 맞물려 부산지역에서도 사회주의운동이 본격화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파업투쟁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예컨대 1925년 12월 13일에는 파업투쟁 과정에서 배출된 선진적 인자 김봉희(金奉喜), 차학순(車學舜) 등 20여 명의 발기로 부산인공청년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제4동우회에는 인쇄노동자 가운데 김봉희, 차학순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파업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적 자각 수준과 정치의식이 고양되었음을 또한 반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1. 「1920년대 전반기 부산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전개와 노동자계급의 항쟁」(<한국 근현대 지역운동사Ⅰ-영남편>),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여강, 서울, 1993
2. 김경일,「1920, 30년대 인쇄출판업에서의 노동운동」(<한국 근현대의 민족문제와 노동운동>),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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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4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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