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발전과 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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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가야 연맹의 발전
1) 후기 가야연맹의 형성
2) 대가야 세력권의 확립
3) 후기 가야 연맹의 영역

2. 가야연맹의 약화
1) 탁기탄국의 신라 투항
2) 백제의 안라 걸탁성 진주
3) 남가락국(금관국)의 신라 투항

3. 가야의 멸망
1)대가야 안라 이원체제로의 분열
2)가야연맹의 자구노력과 백제 부용화
3) 가야 연맹의 신라 복속

본문내용

맹은 내부적으로는 10개 정도의 소국들이 대가야 및 안라를 중심한 남북의 이원체제로 갈라져 있었으나 대외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보조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가야연맹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경쟁하는 사이에서 보다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기 위해 공동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싸. 가야 연맹은 우선 두세 차례나 신라에게 회의를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백제에게 요청했는데, 가야의 회의 요청이 백제의 이해관계와도 합치하는 바가 있어서 둘 사이에 외교 교섭이 이루어졌다.
541년 4월에 안라, 가라, 졸마, 산반해, 다라, 사이기, 자타 등 가야지역 7개 소국의 한기들과 안라왜신관 관리, 즉 가야연맹을 대표하는 사신단이 백제에 모였다. 여기서 회의장소인 [백제]는 곧 천도 직후의 새로운 수도인 사비의 왕정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일단 이 회의를 제 1차 사비회의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야연맹의 사신단은 자신들의 독립보장 및 백제와 화친하게 될 때 예상되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방비책을 함께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제는 자신들이 왜로부터 임나 건립을 위임받았음을 주장하고, 만일 신라가 쳐들어오면 자신이 가서 구해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물건들을 줄 뿐이었다. 백제는 안이한 자세로 신라보다 먼저 가야연맹 제국을 부용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가야연맹 제국은 백제로부터 군령, 성주 축출건에 대한 언급이 없고 가야의 독립 보장도 불철저한 백제와의 제 1차 교섭 결과에 불만을 품고 곧바로 신라와 재접촉을 시도 하였다. 신라와의 교류내용은 알 수 없으나 , 어쨌든 제 1차 사비회의는 상호간의 이해관계 조정에 실패한 것이다. 가야, 백제 사이의 제 1차 교섭은 상호간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쟁점화 되지 못하고 잠복해 있는 상태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났다.
그 후 안라와 백제는 외교를 자기측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각기 제 3자인 왜국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한 듯하다. 이에 대해 왜의 사신이 534년 11월에 한반도에 와서 안라왜신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왜극은 임나의 하한에 들어와 있는 백제 군령, 성주를 왜신관 즉 안라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왜측이 안라 및 가야 연맹 전체에 유리한 국서를 백제에게 전달한 것은 왜신관을 지휘하는 안라의 외교활동이 성공한 결과였다고 보인다.
541년부터 550년까지의 약 10년간에 걸쳐 가야연맹은 안으로는 대가야와 안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패권을 하나로 모으려는 내부 경쟁을 게속해 왔으며, 밖으로는 백제 신라 왜 고구려 등의 사이에서 상호간의 경쟁관계를 이용하여 독립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외교적으로 모색해 왔다. 그러나 백제 성왕이 신라와 외면적인 화친을 유지하면서 선진 문물을 이용하여 가야연맹제국 및 왜를 포섭하는 외교전략을 펴나감에 따라 결국 그에 휘말려 가야 연맹은 독자적 세력을 수립키 위한 자기 구제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채 백제의 부용으로 전락하였다. 백제의 부단한 노력으로 백제와 왜의 교역관계가 정상화되자 실질에 기반을 두지 않는 안라의 왜신관은 구설로서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3) 가야 연맹의 신라 복속
늦어도 550년 초까지 가야연맹 제국은 백제에게 반종속상태로 있었다. 또한 같은 시기인 550년 3월에 백제가 빼앗은 고구려의 道_城(괴산군 도안면) 과 고구려가 함락시킨 백제의 金峴城(진천군 진천읍)을 신라가 다시 빼앗아 가졌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신라와 백제간의 갈등 요인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내분상황을 포착하고, 공동으로 북진하여 한강유역을 탈취하려고 모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551년에 백제와 신라는 한강유역 탈환에 나서, 백제는 하류지역을 공략하고 신라는 상류지역을 공략하였다. 이 때 가야는 백제군을 따라 전쟁에 동원되었다. 이 당시 신라 진흥왕이 청주에까지 순수해 갔는데 가야에서 투항한 우륵과 그 제자를 불러 그 음악을 들었다고 하였다.
우륵은 대가야의 궁정악사였다. 그러한 인물이 대가야가 멸망하기도 전인 551년 3월에 이미 신라에 투항해 있었다는 것은 대가야의 몰락을 예견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야연맹의 백제 부용화가 확정되자, 그는 자신의 12곡의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신라로 망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 후 555년부터 558년에 걸친 일련의 한강유역 경영을 대략 마치고 나서 신라는 가야연맹에 대한 병합에 착수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560년경에 안라국이 먼저 신라에 병합된 듯하다.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북부지역은 조금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대가야는 왜나 백제와의 교역보다는 자체의 제철 능력이나 안정적인 재지농경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말기에는 백제측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자발적으로 친백제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신라에 대하여 좀 더 독자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듯하다. 대가야가 허물어지지 않는 한 그 주변의 가야 연맹 제국도 쉽게 투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가야가 어떠한 선제 군사행위를 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다함의 5천 기병이 대가야 국도까지 먼저 쳐들어갔다. 신라측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가야국을 습격케 하였으며, 가라 사람들 뜻밖에 신라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너무 놀라서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가야는 신라 대군의 기습 공격에 의해 멸망하였던 것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하여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연맹 제국은 대세에 눌려서 거의 일시에 신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고 추측된다. 흠명기 23년(562)춘정월 조의 이른바 임나 10국 멸망기사는 멸망 시점이 정확히 표기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이러한 최종 투항 사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562년 9월 가라국 즉 대가야의 멸망을 전후하여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손국, 임례국 등의 가야 10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전통적으로 왜와의 교역에 전념하지 않는 신라가 관산성전투 이후 백제측의 동향마저 무시하고 무력 병합에 나서자 가야연맹 제국은 자체 저항외에 다른 수단이 없었으니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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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4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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