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늘어난다면 -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 250년 뒤에는 자그마치 4000억의 털 없는 원숭이가 지구 표면에 우글거릴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대도시에서 경험하고 있는 인구 과밀상태가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확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웅대한 사상과 오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동물의 기본적 행동 법칙에 모두 순응하는 보잘 것 없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구가 위에서 말한 수준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을 지배하는 행동법칙을 너무 많이 깨뜨림으로써 지배적인 동물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우리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으며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통제를 초월해 있다는 기묘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동물들이 과거에 수없이 멸종했듯이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사라 질 테고 다른 동물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우리는 자신을 생물학적 표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유연하며 행동양식에서는 뛰어난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회주의가 취할 수 있는 형식은 크게 제한되어있다. 그 제약을 분명히 인식하고 거기에 순응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기회주의적 발전을 우리의 생물학적 요구에 맞추어야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양이 아니라 질은 향상시켜야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진화론적 유산을 부인하지 않고도 극적으로 흥미진진하게 과학기술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억눌린 생물학적 충동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둑이 터지고 그동안 갈고 다듬어온 우리의 존재 전체가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모리스가 내린 결론과 그의 이론들 때문이었는지 조금은 내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막연히 가졌던 자부심은 그 이유를 찾게 되었다. 물론 그의 이론에 100%동조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간 중간 수긍할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다. 먼저 피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자녀수가 제한되자 여자들은 평생 메어있던 부모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사냥 집단에 가담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 쌍의 남녀관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남자들은 정절을 굳게 지키는데 여자가 바깥으로 나돌면서 바람이 나 가정이 파괴된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남편이 남자친구와 어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면 가정에 불성실함을 의미 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여자들은 화내고 바가지를 긁는데 그것은 떼를 지어 사냥하는 원숭이의 오랜 성향이 표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만큼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이해해달라는 말인가.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로 한 쌍의 남녀관계가 위협받게 되자 한 쌍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용이 등장하게 되는데 엿보기(모든 매스미디어가 행하는), 매춘, 동성연애 등이 그것이다. 아무리 혐오스럽고 반도덕적으로 보이는 성행위라고 할지라도 집단의 번식을 방해하지 않는 한 생물학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인구가 많아지면 원칙이 깨어지는데 표본조사에 따르면 밀도가 높아지자 원숭이들이 서로를 죽이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심지어는 자해나 자살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대 격변이 일어난 뒤에 다시 정상적인 번식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물론 산아제한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집단의 번식을 방해하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반도덕적이고 혐오스러운 성행위도 집단의 번식을 막지 않으면 비난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데 결국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금기와 관습의 멍에에 지배받는 작고 낙후된 사회는 지나치게 완고한 문화의 본보기여서 선진 문화가 개종시켜 도와주면 순식간에 무분별한 문화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와 탐험의 흥분을 과용하면 사회를 안정시키는 힘이 무너져 문화적 혼란과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느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문화라고 하는 것을 선진, 후진이라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어느 기준에 의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와 그 사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지 제 3자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생각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시작은 원숭이에게서 진화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느냐 신의 능력으로 창조되었느냐 하는 것은 과학의 능력이나 종교의 믿음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인간이 현재의 모습을 갖기 까지 우리의 조상이라 불리는 원숭이들은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가지면서 그들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기려고 노력했을까. 직립원숭이, 연장을 만드는 원숭이, 사냥하는 원숭이가 되기 위해서 그들이 겪었을 눈물겨운 고난은 현대를 안락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것은 그 종류가 다르다기 보다는 다만 어느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들보다 조금 뛰어난 두뇌를 가져 도시라는 사회를 이루고 지구를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그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듯이 우리도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존재인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생물학적 표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우리가, '털 없는 원숭이'가 유난히 뛰어나 오랜 세월 지구를 지배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어느 다른 동물이 지구를 지배하며 멸종해가는 '털 없는 원숭이'를 동물원 우리 속에 '털 없는 원숭이'라는 팻말과 함께 넣어두고 자신들의 구경거리로 만들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우리 존재에 대해서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모리스가 내린 결론과 그의 이론들 때문이었는지 조금은 내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막연히 가졌던 자부심은 그 이유를 찾게 되었다. 물론 그의 이론에 100%동조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간 중간 수긍할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다. 먼저 피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자녀수가 제한되자 여자들은 평생 메어있던 부모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사냥 집단에 가담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 쌍의 남녀관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남자들은 정절을 굳게 지키는데 여자가 바깥으로 나돌면서 바람이 나 가정이 파괴된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남편이 남자친구와 어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면 가정에 불성실함을 의미 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여자들은 화내고 바가지를 긁는데 그것은 떼를 지어 사냥하는 원숭이의 오랜 성향이 표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만큼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이해해달라는 말인가.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로 한 쌍의 남녀관계가 위협받게 되자 한 쌍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용이 등장하게 되는데 엿보기(모든 매스미디어가 행하는), 매춘, 동성연애 등이 그것이다. 아무리 혐오스럽고 반도덕적으로 보이는 성행위라고 할지라도 집단의 번식을 방해하지 않는 한 생물학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인구가 많아지면 원칙이 깨어지는데 표본조사에 따르면 밀도가 높아지자 원숭이들이 서로를 죽이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심지어는 자해나 자살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대 격변이 일어난 뒤에 다시 정상적인 번식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물론 산아제한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집단의 번식을 방해하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반도덕적이고 혐오스러운 성행위도 집단의 번식을 막지 않으면 비난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데 결국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금기와 관습의 멍에에 지배받는 작고 낙후된 사회는 지나치게 완고한 문화의 본보기여서 선진 문화가 개종시켜 도와주면 순식간에 무분별한 문화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와 탐험의 흥분을 과용하면 사회를 안정시키는 힘이 무너져 문화적 혼란과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느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문화라고 하는 것을 선진, 후진이라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어느 기준에 의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와 그 사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지 제 3자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생각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시작은 원숭이에게서 진화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느냐 신의 능력으로 창조되었느냐 하는 것은 과학의 능력이나 종교의 믿음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인간이 현재의 모습을 갖기 까지 우리의 조상이라 불리는 원숭이들은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가지면서 그들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기려고 노력했을까. 직립원숭이, 연장을 만드는 원숭이, 사냥하는 원숭이가 되기 위해서 그들이 겪었을 눈물겨운 고난은 현대를 안락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것은 그 종류가 다르다기 보다는 다만 어느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들보다 조금 뛰어난 두뇌를 가져 도시라는 사회를 이루고 지구를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그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듯이 우리도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존재인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생물학적 표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우리가, '털 없는 원숭이'가 유난히 뛰어나 오랜 세월 지구를 지배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어느 다른 동물이 지구를 지배하며 멸종해가는 '털 없는 원숭이'를 동물원 우리 속에 '털 없는 원숭이'라는 팻말과 함께 넣어두고 자신들의 구경거리로 만들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우리 존재에 대해서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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