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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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중국, 해상 실크로드의 진원지

16-17세기 호이 안과 베트남의 대외무역

말라카 왕국, 해상 실크로드의 동아시아 무역 거점

본문내용

의 유입이 없었기 때문에 이 오백여명의 남녀는 점차 대를 걸쳐 현지 여인들과 혼인하였다. 명조가 망한 뒤 호이 안에 중국인 유민이 대거 유입되었듯 이 시기 말라카에도 중국인 유민이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포르투갈은 중국인의 경제적 이용가치는 기대하면서도 어떠한 혜택도 제공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에 이어 말라카를 지배한 네덜란드는 달랐다. 네덜란드는 말라카의 중국인이 경제적 중간인의 역할을 잘 해내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변발돼지 도축과일 재배 등을 허용하고 중국인의 도박장 운영을 허락했다. 도박장 운영은 네덜란드 식민정부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말라카에서의 중국인들의 정착은 성공적이었다.
말라카 왕국의 구조와 국제교역
말라카 왕국의 구조
말라카 왕국의 관직구조는 왕의 최측근으로 파티(=파두카 라자Paduka Raja)가 있었고 파티는 번다하라Bendahara에서부터 부파티Bupatih를 거쳐 모든 하급관리까지 모든 관료를 대표했다. 파티 다음가는 직책인 번다하라는 왕국의 재정을 담당하였고 사법부의 수장 역할도 겸하였다. 번다하라는 락사마나Lacsamana와 투멍궁Tumenggung의 동의 하에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락사마나는 말라카 왕국의 해군을 지휘하는 직책이었고 왕의 시종무관으로 번다하라와 관직의 수준이 비슷하다. 투멍궁은 지역의 군권을 쥔 관구사령관이자 해당 지역의 행정권을 가진 영주였다. 투멍궁은 자신의 영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번다하라에게 권한을 넘기기 전까지는 자신의 재량권 안에 두었다. 말라카 지역에서 살고있던 외국인들은 종족에 따라 독립적인 주거지역을 가졌는데 이를 포르투갈인들은 폰다치fondachi라 불렀다. 폰다치의 대표자는 샤반다르Syahbandar(=펑훌루Penghulu)로 이들은 폰다치의 거주인들을 대표하여 다른 폰다치나 말라카 왕국과 교섭하였다. 샤반다르의 임무는 자국민 보호와 자국민이 관련된 무역 업무를 관할하는 것이었다. 말라카의 귀족들은 링가보루나이믈라유 출신으로 크샤트리아로 책봉되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른쪽 옷소매를 신분을 상징하는 금색 표식으로 장식했다. 말라카의 귀족은 이슬람 문화가 오기 전 인도 카스트 제도문화의 영향으로 상업으로 얻어진 부를 향유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다. 무역선의 선장은 항해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 외에 무역행위에서도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키위kiwi라는 직책은 무역선에 화물을 실을 자리를 흥정하는 것으로 무역업이 흥성하면서 이들의 지위도 크게 상승했다. 선장에게 맡기는 물건, 자금, 상황 모두 물주의 책임으로 선장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말라카에는 두 종료의 상인기업인이 있었는데 자본가, 전문판매상이었다. 말라카에서 무역업은 번성했지만 자유무역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귀족계층이 무역행위를 통해 부를 독점하고 정치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 말라카 왕국의 구조였다. 현지의 산업은 귀족들의 착취로 산업화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계속 수공업 상태에 있었다. 즉, 말라카의 부를 만든 것은 무역이되 사회정치 구조는 그 부의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무역업을 지지했기에 말라카 왕국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말라카는 외국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외국상인이 말라카를 떠날 때 재산 일부를 남기고 가던지 그들의 딸을 말라카 왕국 고위계층의 첩실로 남겨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믈라유 엘리트와 외국계 거상 계층 사이의 통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나 이들의 관계는 그리 돈독하지 않았다.
말라카의 국제무역
말라카에서 행해지는 무역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무역 상인이 선주에게 무역행위에 필요한 자금을 투자하는 형태로 무역상인이 재력이 있거나 무역선의 규모가 큰 경우였다. 다른 하나는 무역 상인이 직접 물건을 구입하여 선주에게 위임하거나 자금을 대고 후에 이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모역에 이루어졌다. 말라카의 왕과 관리도 그들 소유의 배를 내놓아 많은 상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무역선은 상인이나 키위가 각각 7-8개의 페탁petak(상품을 담는 나무상자)을 실을 수 있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한 사람 당 초과하여 페탁을 적재하는 것을 금하였다. 선원의 경우 연봉 형식의 봉급을 받았다. 인도 쪽으로나, 중국 쪽으로나 무역선은 기분 80-100%의 이득을 거두었다. 말라카 정부는 상인들로부터 관세무역세거류민세를 거두었으며 관세 책정은 10여명의 무역상인, 5명의 클링, 한명의 투멍궁으로 이루어진 교역물자감정평가위원회가 하였다. 말라카에서는 물건의 중량을 측정하기 위해 ‘카티’라는 추를 사용하였고 주석이 유통수단으로 통용되었다. 후에 금이 유통수단으로 더 인기를 얻는다. 금붙이의 수준을 정확히 감별하기 위해 말라카 왕실은 전문가를 등용하여 직무에 힘쓰도록 하였다.
말라카 중심의 해상 실크로드
말라카에는 동인도의 각종 향료와 기타 양질의 열대작물이 흘러들어와 유럽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정향, 육두구가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말라카 무역상인의 출산지는 자바해 인근의 왕국들부터 서역 도시출신까지 매우 다양했다. 말라카 왕국은 해상 실크로드의 해상무역 거점, 중계무역지로 그치지 않고 자체 무역상품유통망을 가지고 있었다. 말라카의 무역망은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군도 전역부터 인도페르시아, 그리고 아랍, 아프리카 동부, 지중해까지 이어졌다. 또한 동으로는 중국, 한반도 남단, 일본에 이르는 연결고리를 가져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말라카 해양왕국의 오늘
말라카 왕국은 1394~1511년까지 존속하였다. 이후 포르투갈(1511-1641), 네덜란드(1641-1795, 1818-18224), 일본(1941-1945)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말라카는 오늘날 말레이시아 연방의 한 州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으되 유럽문화, 중국문화가 혼재되어 있어 나머지 어떤 주와도 일치되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날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 룸프르 다음으로 중요한 대도시이며 피낭과 함께 경제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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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09
  • 저작시기200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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