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태백산맥과 한국 근현대사의 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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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태백산맥과 한국 근현대사의 재인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43제주항쟁
1.항쟁의 불씨
2.항쟁의 전개과정

여순사건의 배경
사건의 발발과 확산
반란군 점령지역
여순사건의 진압
여순사건의 파장
김지회의 최후와 빨치산의 보복
양민을 구덩이 속으로
대성골의 천불 세례

본문내용

있다.
"이 자리에서 틀림없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순폭동 사건 당시 뚜렷한 확증도 없이 좌익으로 매도하여 무고한 죽음을 당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순폭동 사건과 6.25전쟁 중에 빨치산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주민들의 숫자보다 아군에게 죽음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마천애향회의 「마천향토지」)
여순사건 이후 마천면에서도 좌익 인사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살벌하게 벌어졌다. 마천면민 10여 명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처형이 되었다. 매암리에 살면서 면서기를 하고 있던 곽종태, 윤봉준도 좌익분자로 몰려 애매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 마천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강화춘(마천면장 역임)의 증언에 의하면 "3연대 때문에 소(沼)를 팠다"고 한다. 그들의 학정으로 마천 주민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또 비슷한 시기에 군자부락 앞(다리목 뒤 언덕) 조그마한 산(현재 밭으로 변함)에서 민간인 70~120명(당시 민보단 대원이었던 이동근은 70명 주장, 동 대원이었던 동순호는 120명 주장)으로 추산되는 이들이 집단으로 총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 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군내(함양) 사람인것 같다고 한다. 이들의 죄목은 빨갱이였다. 이들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으며, 10대도 있고 중늙은이도 있었다.(그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왔다)
군인들은 마천의 민보단 대원(이들은 평소에 죽창을 무기로 하고 마천지서와 면사무소 경비를 서거나, 토벌군의 잔심부름을 하였다)들을 시켜 흙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 구덩이 앞에 끌고 온 민간인들을 3명씩 세워 총검으로 가슴을 찔러 구덩이 속으로 넘어뜨렸다.
구덩이 속에 떨어진 이들 중에는 신음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즉사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총검으로 찌를 때 기합 비슷한 소리에 놀라 찌르기도 전에 구덩이에 떨어진 이도 있었다고 한다.
토벌군들은 총검을 찌르기 전에 할 말이 있는가, 있으면 하라고 했다. 그들 중 다수가 난 아무 죄가 없다는 말만 할 뿐 공산주의를 찬동하는 말은 없었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공산주의를 찬동하는 이들도 없진 않겠지만, 다수는 무고한 양민으로 혐의만 받고 끌려와 죽은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이를 지켜본 이들은 말한다.
처형을 받은 사람 중에 17,18세된 처녀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 더러운 놈들아, 빨리 죽여라. 아버지 심부름 갔다 온 것도 죄가 되느냐, 어서 죽여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한 구덩이에 파묻었는데, 파묻을 때 많은 이가 죽지 않아 신음을 내기도 하였다. 흙을 다 덮은 후 토벌군들은 흙속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다음날 보니까 그들을 묻은 구덩이에서 사람이 빠져나온 듯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한다.'
「마천 향토지」는 자신들의 고장에서 벌어졌던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기록을 작성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의도는 좌우익에 대한 정죄나 편가르기, 혹은 어느 한쪽에 대한 두둔보다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 있다. 이 비극의 책임은 북과 남이 동시에 져야지,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논리는 분단논리이며, 이 분단논리야 말로 남북의 지도자들이 서로이 정권 유지를 위한 얄팍한 전술이었던 것이다.'
대성골의 천불 세례
지리산 주능선의 세석고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백무동이, 서남쪽은 대성동이 자리한다. 대성동은 현재는 마을이 사라지고 외딴집 몇 채만 있으나, 6.25전쟁 당시에는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백무동과 대성동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을 백무동계곡 대성계곡으로 부르고, 그 골짜기를 대성골 백무골이라 일컫는다.
1952년 1월 지리산 빨치산 부대들은 수도사단 등의 대공세에 악전고투를 면치 못한다. 특히 지리산의 대표적인 이 두 큰 골짜기에서 빨치산들은 수도사단 등의 동계 대공세에 휘말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 두 골짜기는 그들의 지리산에서의 운명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해 주었다.
지리산의 겨울 날씨는 혹독하기만 하다. 허리까지 빠지는 적설량이 신속한 이동을 제약하는가 하면, 밤이 되면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기온이 몸도 마음도 얼어붙게 만든다. 토벌군은 이런때를 이용하여 화력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어 빨치산에 대한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빨치산은 보급투쟁으로 연명을 하는데, 토벌군은 이를 막기 위해 산간마을, 심지어 사찰까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또한 유인마을 입구에는 토벌군 매복조가 잠복하거나 봉쇄선을 쳐 놓고 대비하였다.
51년 12월부터는 이 때문에 빨치산은 보급 투쟁에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빨치산에게는 세 가지 각오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가 그것이다. 빨치산에게 이 세 가지 각오를 절감토록 만들어 준 것이 52년 1월과 2월에 걸친 토벌군의 동계 대공세였다.
수도사단은 52년 1월 중순 빨치산들을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이 대성골에 몰아 넣은 뒤 무려 10여일 동안에 걸쳐 엄청난 화력을 무차별 쏟아부었다. 깊은 대성골 골짜기가 온통 불바다를 이루었다. 당시의 상황을 여자 빨치산 정순덕은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그때의 대성골은 밤낮으로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 지리산 근방에 살던 사람들은 그때의 불을 하늘에서 떨어진 불이라하여 천불이라고 했다."
실제로 수도사단은 각종 포탄을 이 골짜기에 쏟아부어 빨치산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빨치산들은 토벌군의 줄기찬 공격에 맞아 죽거나 추위에 얼어죽고, 그리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굶어 죽어야 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에는 밤낮 없이 숨어 있거나 쫓겨다니기만 하는 일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정순덕은 여자의 몸으로 이 대성골 사지(死地)에서 죽지 않고 간신히 살아 남는다. 그러나 그녀가 거림골 산죽밭 움막으로 도망쳐 의식을 잃게 되기까지는 일반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닷새에 걸친 생존을 위한 기막히 사투 과정이 있었다.
'불길이 잡히고 난 다음에도 한 웅큼의 쌀과 바위 틈새에서 떨어지는 물로 연명하며, 서 있는 상태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5일 이상 초인적으로 버티어 냈다.'(정충제의 「실록 정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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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1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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