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기원전 3세기
1. 동방 각국의 상호 투쟁
2. 참신한 외교 정책 - 원교근공
3. 여불위와 한비
4. 6국의 멸망
5. 찬란한 80년대(기원전 220년~ 기원전 211년)
6. 영정 대제
7. 분서갱유
8. 진 왕조의 갑작스런 와해
9. 우담화 같았던 서초 왕국
10. 서한 왕조의 통일
기원전 2세기
1. 사막에서 일어난 흉노 한국
2. 도가 사상의 실천 - 황로정치
3. 7국의 난
4. 뿌리를 내린 유가 사상
5. 흉노 한국에 대한 반격
6. 서역을 소통시킨 장건
7. 중국 강토의 재확장
8. 한부
기원전 1세기
1. 사마천과 노온서
2. 외척정치
1세기... 와 서한의 멸망
1. 동방 각국의 상호 투쟁
2. 참신한 외교 정책 - 원교근공
3. 여불위와 한비
4. 6국의 멸망
5. 찬란한 80년대(기원전 220년~ 기원전 211년)
6. 영정 대제
7. 분서갱유
8. 진 왕조의 갑작스런 와해
9. 우담화 같았던 서초 왕국
10. 서한 왕조의 통일
기원전 2세기
1. 사막에서 일어난 흉노 한국
2. 도가 사상의 실천 - 황로정치
3. 7국의 난
4. 뿌리를 내린 유가 사상
5. 흉노 한국에 대한 반격
6. 서역을 소통시킨 장건
7. 중국 강토의 재확장
8. 한부
기원전 1세기
1. 사마천과 노온서
2. 외척정치
1세기... 와 서한의 멸망
본문내용
는 잔인한 진압 정책을 동원하게 만들었다. 도가 방사가 법술이 효험이 없으면 사형에 처하려 한다고 하고 그는 선단만 단련하고 선약만 구할 줄 안다고 떠벌렸다. 이 말을 들은 영정 대제는 죄상이 확실한 460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이상 두 가지 사건을 흔히들 \'분서갱유\'라 부른다. 이 사건으로 유가 학파는 영정 대제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강력한 무력과 엄격한 법으로 통일은 일단 성취되었으나, 이미 춘추이래 발달한 각 지역의 독자적 문물과 창의적인 생각, 비판적 언론이 문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랬다.
8. 진 왕조의 갑작스런 와해
영정 대제는 현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죽음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선의 도움을 받길 원했다. 영정 대제는 불사약을 찾고자 했지만 끝내 그것을 뱃속에 넣지 못하고 기원전 210년, 순수 도중 사구에 이르러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영정 대제는 죽기 전 큰아들 영부소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 유언을 남겼고, 어린아들 영호해는 이사, 조고와 함께 황제 계승권을 빼앗게 되었다. 영호해가 즉위하고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켜 지방 정부를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로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고 사라진 과거 여섯 왕국의 이름을 다시 들춰내거나, 6국의 후예들을 명목상 국왕으로 삼았다.
유방과 항우도 이때에 봉기하여 여러 제후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 왕조가 세운 제국은 영호해가 즉위한지 불과 14개월 만에 지난날 전국시대로 다시 회귀했다. 항우는 옛 초 왕구의 대자 항연의 손자였고, 유방은 패현 지역 건달 유랑자의 두목들 중 하나였다. 항우는 초 왕국 21대 국와 미괴의 손자 미심을 초왕으로 옹립하여 초 왕국의 유민들에게 호소했다. 유방은 미심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고 진 제국의 수도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진 왕국 국왕으로 삼겠다고 선포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조고는 재상 이사를 모함하여 이사 부자를 함께 처형하게 만들었다. 조고는 정부를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기원전 206년에 유방이 함양을 압박하면서 방대한 규모에 찬란한 업적을 남긴 진 제국이 멸망했다. 기원전 221년에 6개 왕국을 완전히 휩쓴지 겨우 16년 만이었고, 영정 대제가 죽은지 불과 3년이었다.
진 왕조의 멸망이 이럽게 급했던 까닭으로는 첫째, 중국의 오랜 법가 학파의 법치는 군주의 권력을 기초로 한 거스로 오늘날 인권을 기초로 한 법치와는 많이 달랐다. 법치는 정치가 부패하게 되면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백성을 박해하게 만들어 결국 폭정으로 나타난고 만다. 둘째, 진 왕조가 천하를 통일한 기간이 너무 짧아서 전후 10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정부에 대한 인민의 충성심에 관성이 붙기에는 너무 짧았다. 셋째, 마지막 원인은 영호해였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9. 우담화 같았던 서초왕국
유방이 먼저 진 왕조를 멸망 시켰기
8. 진 왕조의 갑작스런 와해
영정 대제는 현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죽음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선의 도움을 받길 원했다. 영정 대제는 불사약을 찾고자 했지만 끝내 그것을 뱃속에 넣지 못하고 기원전 210년, 순수 도중 사구에 이르러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영정 대제는 죽기 전 큰아들 영부소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 유언을 남겼고, 어린아들 영호해는 이사, 조고와 함께 황제 계승권을 빼앗게 되었다. 영호해가 즉위하고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켜 지방 정부를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로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었고 사라진 과거 여섯 왕국의 이름을 다시 들춰내거나, 6국의 후예들을 명목상 국왕으로 삼았다.
유방과 항우도 이때에 봉기하여 여러 제후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 왕조가 세운 제국은 영호해가 즉위한지 불과 14개월 만에 지난날 전국시대로 다시 회귀했다. 항우는 옛 초 왕구의 대자 항연의 손자였고, 유방은 패현 지역 건달 유랑자의 두목들 중 하나였다. 항우는 초 왕국 21대 국와 미괴의 손자 미심을 초왕으로 옹립하여 초 왕국의 유민들에게 호소했다. 유방은 미심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고 진 제국의 수도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진 왕국 국왕으로 삼겠다고 선포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조고는 재상 이사를 모함하여 이사 부자를 함께 처형하게 만들었다. 조고는 정부를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기원전 206년에 유방이 함양을 압박하면서 방대한 규모에 찬란한 업적을 남긴 진 제국이 멸망했다. 기원전 221년에 6개 왕국을 완전히 휩쓴지 겨우 16년 만이었고, 영정 대제가 죽은지 불과 3년이었다.
진 왕조의 멸망이 이럽게 급했던 까닭으로는 첫째, 중국의 오랜 법가 학파의 법치는 군주의 권력을 기초로 한 거스로 오늘날 인권을 기초로 한 법치와는 많이 달랐다. 법치는 정치가 부패하게 되면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백성을 박해하게 만들어 결국 폭정으로 나타난고 만다. 둘째, 진 왕조가 천하를 통일한 기간이 너무 짧아서 전후 10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정부에 대한 인민의 충성심에 관성이 붙기에는 너무 짧았다. 셋째, 마지막 원인은 영호해였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9. 우담화 같았던 서초왕국
유방이 먼저 진 왕조를 멸망 시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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