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해방이 오게 된 배경
2. 대한정책의 결정
3. 대한정책의 실시
◎ 신탁통치 - 4대국 공동관리
◎ 대륙적 가치의 모색
A. 미국의 입장 - 통일관리
B. 소련의 입장 -현상유지
4. 미국과 소련의 주요회담
◎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얄타 회담
◎ 포츠담 회담
◎ 38도선 획정
◎ 모스크바 3상회의
5.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과정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6.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과정
Ⅲ. 결 론
▣ 참고문헌
Ⅱ. 본 론
1. 해방이 오게 된 배경
2. 대한정책의 결정
3. 대한정책의 실시
◎ 신탁통치 - 4대국 공동관리
◎ 대륙적 가치의 모색
A. 미국의 입장 - 통일관리
B. 소련의 입장 -현상유지
4. 미국과 소련의 주요회담
◎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얄타 회담
◎ 포츠담 회담
◎ 38도선 획정
◎ 모스크바 3상회의
5.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과정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6.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과정
Ⅲ.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후에 러일전쟁 때 극동지역에서 상실한 권리를 회복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지역으로 진격 할 때, 만주와 조선의 국경선을 폐쇄하여 만주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주요 항구를 점령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소련군은 나진, 청진을 점령한 후 일본의 항복 발표 후에도 소련군 참모본부는 전투정지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과의 전투행위는 계속되었다. 한편 소련군 미점령지역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협력에 의한 조선인 자치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당국은 `스탈린 지령‘을 시달하여 미군 진주에 앞서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성립시켜 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어 우리나라의 분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 비평, 1999 (pp. 218~226)
3. 결 론
1945년부터 48년 사이의 이른바 `해방정국‘은 미소 양군이 각기 남과 북으로 진주하여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군정을 펴나감으로써 남북 간의 대립구도를 원초적으로 형성한 시기이다. 남쪽에서는 미국이라는 외압력이, 북쪽에서는 소련이라는 외압력이 힘의 축을 주도하게 되었던 미소군정하에서는 내부로부터 왕성하게 제기되었던 갖가지의 건국구상과 그에 따르는 힘의 결집작용까지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역학관계의 동태 속에서 각기 자국에 우호적추수적(追隋的)인 정부의 수립을 선호하는 미국과 소련에 영합하는 방향에서 배타적으로 이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한반도 위에서 동시에 충족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두가지의 체제가 동시에 수립되는 민족적 모순의 극대화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북한에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815 민족해방도 주관적으로는 민족 최대의 희생이 대가를 치른 `쟁취적 해방’이었지만 객관적으로는 연합국에 의하여 `주어진 해방‘으로 현실화되었다가 급기야는 분단체 연합국에 의하여 `부정된 해방’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정국이 전개되고 있었던 당시는 우리 민족의 선택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던 때이며, 따라서 그러한 외세에 의한 힘의 작용이 우리 민족의 생존조건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때이다. 이 때문에 우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서 각기 어떠한 정책을 펴나갔는가 살펴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더불어 급격하고도 큰 폭으로 몰아닥친 사회경제적 격변과 충격도 긴급한 민생문제의 해결, 나아가서는 한 시대를 새롭게 열기 위한 제도개혁의 성취여부와 깊이 상관되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각기 남한과 북한에서의 점령외세의 대한반도정책, 사회경제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종합적인 역사상을 구축하여야 하겠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근간은 신탁통치안(trusteeship)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쟁 이후 신세계질서 구상의 일환이었다. 이 정책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반영되었고, 집단안전보장의 개념이 포함되었으며 미국 중심적인 정치경제체제 우월주의의 표현이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전후에 있어서 한반도를 동유럽과 동일하게 국가 안보상 중요지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축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민족공산 세력의 연합정권을 수립, 점차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위성국으로 만든다는 적극적혁명적인 정책을 구체적 행동계획으로 치밀하게 수립하여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함께 체계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은 우리나라의 분단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소련 역시 처음에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미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좌익이 주축이 된 인민위원회였고 민족주의세력도 힘이 있는 이들은 중도좌파에 속해있는 인물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소가 분할점령한 상태에서 미국이 그런것에 응할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했고 그런 상황에서 삼상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미영중소 주도의 신탁통치안을 실시한다는 것을 얻어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대 공산주의 진영이 3대 1이라는 것을 높게 봤던 것이다. 반면 소련은 그것을 양보한 대신 한국임시정부의 참여를 확정지어 나름대로 이익을 챙겼다. 한국임시정부의 구성은 좌익이 강세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삼상회의 결정은 양국의 이익이 교묘히 배합된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을 처음 주장한 미국조차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몰랐지만 어쨌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은 통과되었다.
결의문을 살펴보면 미소공위 설치, 국내 제 정치단체들과 협의, 임시정부수립, 임정참여하의 신탁통치방안 협의, 미소의 확정의 순서대로 진행될 것이었다. 즉 외국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련이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미소의 후견하에 임시정부의 주도로 나라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찬탁반탁의 문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의 문제였는데 거센 반탁운동 속에서 이런 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일관성 있는 의견을 더욱 영향력 있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시독립에의 강한 열망은 삼상회의 결의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하였고 이를 악용하여 득세한 민족 반역자들에의해 결국 폐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미소가 너무도 불안정한 국내정세를 보고 결의 당시부터도 가변적이었던 신탁통치안을 계속 추진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자국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택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탁치안의 지지목적도 결국은 자국에의 우호적 정부수립이었고 단정수립으로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1.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 비평, 1999.
2.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1998.
3. 小此木政夫, 『韓國戰爭』<美國의 介入過程>, 청계연구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어 우리나라의 분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 비평, 1999 (pp. 218~226)
3. 결 론
1945년부터 48년 사이의 이른바 `해방정국‘은 미소 양군이 각기 남과 북으로 진주하여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군정을 펴나감으로써 남북 간의 대립구도를 원초적으로 형성한 시기이다. 남쪽에서는 미국이라는 외압력이, 북쪽에서는 소련이라는 외압력이 힘의 축을 주도하게 되었던 미소군정하에서는 내부로부터 왕성하게 제기되었던 갖가지의 건국구상과 그에 따르는 힘의 결집작용까지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역학관계의 동태 속에서 각기 자국에 우호적추수적(追隋的)인 정부의 수립을 선호하는 미국과 소련에 영합하는 방향에서 배타적으로 이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한반도 위에서 동시에 충족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두가지의 체제가 동시에 수립되는 민족적 모순의 극대화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북한에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815 민족해방도 주관적으로는 민족 최대의 희생이 대가를 치른 `쟁취적 해방’이었지만 객관적으로는 연합국에 의하여 `주어진 해방‘으로 현실화되었다가 급기야는 분단체 연합국에 의하여 `부정된 해방’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정국이 전개되고 있었던 당시는 우리 민족의 선택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던 때이며, 따라서 그러한 외세에 의한 힘의 작용이 우리 민족의 생존조건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때이다. 이 때문에 우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서 각기 어떠한 정책을 펴나갔는가 살펴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더불어 급격하고도 큰 폭으로 몰아닥친 사회경제적 격변과 충격도 긴급한 민생문제의 해결, 나아가서는 한 시대를 새롭게 열기 위한 제도개혁의 성취여부와 깊이 상관되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각기 남한과 북한에서의 점령외세의 대한반도정책, 사회경제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종합적인 역사상을 구축하여야 하겠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근간은 신탁통치안(trusteeship)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쟁 이후 신세계질서 구상의 일환이었다. 이 정책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반영되었고, 집단안전보장의 개념이 포함되었으며 미국 중심적인 정치경제체제 우월주의의 표현이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전후에 있어서 한반도를 동유럽과 동일하게 국가 안보상 중요지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축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민족공산 세력의 연합정권을 수립, 점차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위성국으로 만든다는 적극적혁명적인 정책을 구체적 행동계획으로 치밀하게 수립하여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함께 체계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때문에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은 우리나라의 분단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소련 역시 처음에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미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좌익이 주축이 된 인민위원회였고 민족주의세력도 힘이 있는 이들은 중도좌파에 속해있는 인물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가 수립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소가 분할점령한 상태에서 미국이 그런것에 응할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려했고 그런 상황에서 삼상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미영중소 주도의 신탁통치안을 실시한다는 것을 얻어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대 공산주의 진영이 3대 1이라는 것을 높게 봤던 것이다. 반면 소련은 그것을 양보한 대신 한국임시정부의 참여를 확정지어 나름대로 이익을 챙겼다. 한국임시정부의 구성은 좌익이 강세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삼상회의 결정은 양국의 이익이 교묘히 배합된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을 처음 주장한 미국조차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몰랐지만 어쨌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은 통과되었다.
결의문을 살펴보면 미소공위 설치, 국내 제 정치단체들과 협의, 임시정부수립, 임정참여하의 신탁통치방안 협의, 미소의 확정의 순서대로 진행될 것이었다. 즉 외국군에 의한 점령통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련이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미소의 후견하에 임시정부의 주도로 나라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찬탁반탁의 문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의 문제였는데 거센 반탁운동 속에서 이런 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일관성 있는 의견을 더욱 영향력 있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시독립에의 강한 열망은 삼상회의 결의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게 하였고 이를 악용하여 득세한 민족 반역자들에의해 결국 폐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미소가 너무도 불안정한 국내정세를 보고 결의 당시부터도 가변적이었던 신탁통치안을 계속 추진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자국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택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탁치안의 지지목적도 결국은 자국에의 우호적 정부수립이었고 단정수립으로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1.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 비평, 1999.
2.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1998.
3. 小此木政夫, 『韓國戰爭』<美國의 介入過程>, 청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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