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칸느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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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영화제와 스타 : 공생의 관계

2. 영화 산업과 스타의 존재

3. 스타와 인기인

4. 인기인에서 진정한 스타로

5. 칸느를 수놓은 몇 몇 스타들

6. 스타와 감독들

본문내용

수혜자들은 배우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감독들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배우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이들을 진정한 스타로 키워냈던 칸느 영화제는 이 뿐 만아니라 평범한 영화인들이 절치부심하는 계기를 마련해거나, 나아가 세계 영화사에서 족적을 남기는 중요한 감독이 되게끔 지원과 배려를 아까지 않았다.
1989년, 당시 무명이었던 스티븐 소더버그는 칸느를 통해서 스타로 부각된 전형적인 감독이다. 처녀작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칸느를 방문하였을 때,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질 자콥이 이 무명의 감독에게 주저 없이 황금종려상을 주었던 일은 매우 상징적으로 칸느의 이러한 기능을 설명해준다. 이처럼 ‘올챙이’ 작가들의 능력을 적극 발굴하여 ‘스타’로 만드는 일은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내내 칸느가 수행하였던 중요한 임무이기도 하였다. 처녀작을 출품하여 수상의 영광을 맛본 경우는 비단 소더버그 뿐만이 아니었다. 알란 파커, 나니 모레티, 파벨 롱긴, 라르 본 트리에 등등은 모두 칸느가 주목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스타이자 감독으로 부상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편, 이와 같이 처녀작은 아니더라도 두 번째나 혹은 세 번째 영화를 주목한 경우 또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우스키를 꼽을 수 있다. 세계 영화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볼 때, 전적으로 칸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이들은 칸느에서 얻은 명성을 토대로 자신들의 캐리어를 구축하였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이 두 감독이 칸느 영화제에 앞서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먼저 부각된 데에 따른 칸느의 경쟁심과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칸느를 통해서 스타로 부각된 감독들 중, 토르나토레와 루이스 부뉴엘은 좀 각별한 경우이다. 만약 『시네마 천국』이 1989년 제 42회 칸느 영화제에 출품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토르나토레 감독이 이처럼 강렬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한편, 충격적인 영화를 선보이며 세계 영화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던 루이스 부뉴엘이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게 된 데에는 『바리디아나』(61년, 14회)의 황금종려상 수상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좀 과장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지배하면서도 일상에서 억눌려 있던 성, 정치, 권력, 종교, 욕망의 담론들을 프랑스와 멕시코, 미국을 배경으로 다양한 화면 속에 충격적으로 담아내면서 오늘날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으로 부각된 부뉴엘이 난해함의 틀을 벗고 대중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는 데는 알게 모르게 칸느에서의 수상이 자그마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대중을 감싸 안았다는 측면에서 부뉴엘은 탁월한 예술가이자, 결국에는 한명의 진정한 스타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드레이 와이다의 칸느에서의 활약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와이다에게 최고의 폴란드 영화감독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평가의 이면에는 칸느에서 펼쳤던 다양한 그의 활약이 자리하고 있다. 와이다는 스타 감독이 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캐리어를 칸느에서 구축했다고 할 정도로 57년부터 97년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차례나 칸느에 출품하는 등, 칸느를 가장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81년 황금종려상(『철의 인간』)을 비롯해 4차례나 수상의 범위 안에 들었던 동구권 감독이었다. 한 마디로 와이다야 말로 칸느가 주목하여 발굴해내고, 또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키운’ 대표적인 동구권 스타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유고의 에릴 쿠리트리카 또한 칸느에서 주목 받아 세계에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총 4번 출품하여 두 번의 황금종려상(『아빠는 출장 중』(85년, 37회), 『언더그라운드』, 95년, 47회)을 비롯해 총 5개의 상을 걸머쥔 쿠리타리카는 와이다와 더불어 칸느를 통해 세계에 알려진 진정한 스타감독이었다
이에 비해 캔 로치는 오히려 칸느 영화제를 통해서 절치부심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작품 『아버지의 땅』같이 극소수의 팬들에게 인정받을 뿐이었던 캔 로치는 81년 『룩스 앤 스마일』, 91년 『리프 라프』, 93년에 『레이닝 스톤』을 칸느에서 발표하였고, 이어 95년에 『랜드 앤 프리덤』을 계기로 난해하다는 평을 핑계로 주목하지 않던 몇 몇 비평가들과 극적으로 ‘화해’를 하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칸느는 영화감독들이 절치부심 끝에 결국 재기에 성공하여 진정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도와주는 발판 역할을 하였으며 캔 로치는 가장 활발하게 칸느에서 활동한 감독으로 이름을 남긴다.
한편, 90년대 미국 영화가 칸느에서 화려한 스타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기 이전에 80년대 칸느가 우디 알렌에게 보였던 사랑은 좀 각별한 것이었다. 물론 우디 알렌은 80년대에 단 한번도 직접 칸느를 방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뉴욕과 부룩클린을 오가며 만든 그의 지적인 코메디 『맨하탄』(79년), 『브로드웨이 대니 로즈』(84년), 『카이로의 붉은 장미』(85년), 『한나와 그 자매』(86년),『라디오 데이즈』(87년), 『뉴욕 스토리』(89년)가 차례로 비공식 부문에 출품되어 각광을 받았다. 미국에서 개봉되기 이전에 오히려 프랑스나 유럽에서 더 환영받는다고 평할 만큼, 특히 프랑스에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우디 알렌의 영화를 주목했던 곳은 바로 칸느 영화제였다. 미국영화라기 보다는 오히려 뉴욕 영화라고 해야 할 우디 알렌은 칸느를 통해서 유럽으로의 통로를 확보하였다. 아니 80년대 칸느 영화제는 우디 알렌이라는 스타를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리고 선전해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 이외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배우들과 감독들, 영화관계자들이 칸느에서 탄생하였다. 아마 한권의 책 분량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음 기회를 약속한다. 참고로 이 글은 칸느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1998년 출간된 칸느 영화제 50주년 특집호 <카이에 뒤 시네마>와 <텔레라마> 지, 그리고 칸느 영화제와 관련된 몇 권의 프랑스 책을 자료로 삼았다.

키워드

스타,   영화제,   칸느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6.06.07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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