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무니붓다(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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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절 붓다 시대의 종교 사상계
1. 사회변동과 계급제도의 붕괴
2. 정통바라문의 사상
3. 사문들의 출현

제 2절 사카무니의 생애
1. 탄생의 젊은날들
2. 출가,구도,깨달음
3. 최초의 설법과 교화활동
4. 영원한 인류의 스승

본문내용

대답을 주는 일도 있었다.
붓다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교화 방법과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교세는 빠르게 확대되어 갔다. 당시 인도의 종교 사상계에서 볼 때 붓다는 한 사람의 사문에 불과했다. 그런 붓다의 가르침이 계층에 구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치면서 급속하게 번져 나간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기성 종교인들은 붓다와 그의 교단을 질시하고 음해를 가해왔다. 바라문들이 여인을 시켜 임신을 한 것처럼 꾸며 붓다의 아이를 가졌다고 사람들에게 외치게 하여 망신을 주고자 하는가 하면, 탕녀를 죽여 묻어 놓고는 붓다의 교단에서 한 짓이라고 모함하기도 하였다. 갖가지 방법의 비방과 모함이 소용없자 심지어는 음식에 독약을 넣어 붓다를 살해하려고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오히려 붓다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에 더욱 더 귀 기울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게 하는 진리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현실생활을 보다 진실하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었으며, 행복의 삶을 이루게 하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붓다는 외도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던 앙굴리말라를 구제한 일도 있었고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삶의 진실을 일깨워 주고, 허영과 교만에 찬 여성으로 하여금 찬된 길을 걷게도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에게는 정법에 의한 선정을 설하는가 하면, 이웃 나라 사이의 전쟁을 미리 막아 평화로운 국교를 유지케 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가르침과 교화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그러나 붓다도 그 말년에는 몇가지 불행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사촌동생인 데와닷따가 교단의 분열을 꾀하였고, 몇 차례나 붓다의 살해를 기도하기까지 하였다. 또 코살라의 쁘라세나지뜨왕의 아들 비두다바가 즉위하자, 그는 왕자 시절에 샤카족에게서 받았던 수모를 갚기위해 카삘라와스뚜를 침공하여 샤카족을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붓다의 아들 라훌라 그리고 두 큰제자 사리뿌뜨라와 목갈라나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도 붓다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되었다.
붓다는 80세를 끝으로 45년간 긴 교화활동의 막을 내렸다. 그는 충실한 시자였던 사촌동생 아난다와 함께 라자그리하의 영취산을 뒤로하고 마지막 전도여행 길을 떠났다. 도중 베샬리에서 우안거를 보내면서 심한 병에 걸렸다.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을 아난다에게 예고하였다.
그 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다시 여행을 계속하던 붓다는 파와라는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로부터 음식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탈이 되어 심한 식중독을 앓게 되자, 붓다는 쿠쉬나가라 변두리의 사라나무 숲으로 들어가 두 그루의 큰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 곳에서 붓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든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으면 묻도록 하였다. 대중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자기 스스로를 광명으로 하고 법을 광명으로 삼아 남을 광명으로 삼지 마라.
태어나고 시작된 모든 것은 반드시 멸하고 끝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
이렇게 최후의 가르침을 남긴 뒤에, 붓다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을 향해 누워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이를 흔히 입멸 이라고도 표현한다. 이것은 붓다가 80세 되는 해 베샤카 달의 보름날 밤이었다.
붓다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과 신도들은 붓다의 유해를 화장했다. 붓다의 몸에서는 많은 사리가 나왔다. 장례에는 여덟나라의 왕들도 참석했는데 이들이 서로 사리를 차지하려는 바람에 자칫 분쟁이 일어날 뻔 했다. 다행히 한 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는 여덟 몫으로 똑같이 나누어졌다. 사리를 담았던 그릇과 유해를 태운 재를 얻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각자 자기나라로 가지고 돌아가서 탑을 모셨다. 이것이 불탑의 효시로서,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불교도들은 이 탑을 그들의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붓다가 열반에 든 다음 그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붓다가 남긴 가르침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이 잊혀져 버리기 전에 그것을 모아 확정해 두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고, 또한 붓다가 없는 승단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이를 서둘러야 했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것을 결집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런 작업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구송해서 했기 때문에 합송이라고도 부른다.
불전의 결집은 역사상 여러 차례 되풀이 되었다. 그 가운데 제 1회 결집은 붓다가 열반에 든 후 맞이하게 된 첫 우기의 안거 때라자그리하 부근의 바이와라산 중턱의 칠엽굴에서 행해졌다. 결집을 위해 덕이 높은 비구 제자 5백명이 선출되었으며, 상수제자마하까사빠가 총책임자가 되어 모임을 주관하였다. 이 첫 결집에서 법, 즉 경의 암송자로 아난다가 그리고 율의 암송을 위해서는 우빨 리가 뽑혔다.
아난다는 붓다의 시자로서 가장 오랫동안 붓다를 모시고 있었으므로 그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또 우빨리는 붓다가 계를 설할 때마다 붓다를 돕기 위해 그의 곁에 있었으므로 계율에 있어서는 교단 내에 제일 인자로 꼽혔었다. 이 두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들은 대로 기억해 내어 외우면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비구들이 그 진위를 토론하고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런 다음 목소리를 함께하여 함송하면서 그들의 기억속에 그것을 간직해 갔다. 붓다의 가르침, 즉 오늘에 남겨진 불교의 경과 율은 이렇게 해서 편집되어진 것이다.
붓다는 2500여년전에 세상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러나 생애를 통해 보았듯이, 그의 구도와 성도 그리고 교화와 입멸의 과정은 참으로 위대한 일생이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잊을수 없는 감명과 깨달음을 주었다. 또한 오늘에 와서도 붓다는 여전히 헤어릴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닌 지혜와 자비의 인물로 이 시대의 사람들 앞에 다가온다. 붓다는 진정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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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08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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