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허난설헌 이름 초희 기록에 대한 검증
3. 허난설헌의 수학 과정과 천부적 글 솜씨
4. 다양한 글 형식에 재능을 가진 허난설헌
5. 허난설헌 시문집 편찬과 전파에 앞장 선 허균
6. 허난설헌 작품을 감상한 김선의 논평
7. 결론
2. 허난설헌 이름 초희 기록에 대한 검증
3. 허난설헌의 수학 과정과 천부적 글 솜씨
4. 다양한 글 형식에 재능을 가진 허난설헌
5. 허난설헌 시문집 편찬과 전파에 앞장 선 허균
6. 허난설헌 작품을 감상한 김선의 논평
7. 결론
본문내용
특히 선조 연간에 그 성함이 극에 달했다 보고, 당시 문장으로 이름이 난 작가들을 열거해 놓았다. 여기에 허난설헌의 이름이 金時習, 金麟厚, 鄭士龍, 이달, 최경창, 백광훈, 林悌, 權? 등과 나란히 열거되어 있다.
또 김선은 ≪난설헌집≫을 읽고 난 후에 느낀 점을 시로써 남겼다. <題蘭雪齋後>에서:
허씨 집안 여인이 가장 맑고 빼어나 許家有女最淸秀
허난설헌의 시는 마치 귀신이 말하는 듯 蘭雪詩如語鬼神
시구가 비록 문사의 귀를 놀라게 하지만 詩句縱驚文士耳
베를 짜서 남편을 봉양함만 못하리 不如蠶織奉南?
이 시는 1619년(광해군 11) 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시서유고≫의 편찬 방식은 연대순으로 나열되었는데, 이 시의 다다음 시가 <己未十月十九日, 與妻共觀庭中沈菁菜>이다. 기미년은 1619년에 해당된다. 김선은 이 시에서 여성 문인에 대해 양면적인 심리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허난설헌이 허씨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문인으로 그녀의 시는 마치 귀신이 지은 듯 몹시 공교롭고 뛰어나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남성 문인들이 허난설헌의 글 솜씨를 인정하는 사실과 부합된다. 그렇지만 남성 문인들은 이내 남성 위주의 편협된 사고 방식에 젖어 허난설헌이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들은 여성의 미덕이 어디까지나 남편을 봉양하고 집안 일을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비록 허난설헌의 시가 이들의 귀를 놀라게 할 정도로 몹시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시문 창작은 어디까지나 남성 문인의 전유물이지 여성이 문장 창작 작업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는 못마땅히 여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김선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보편적 사고 방식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앞서 논한 김중청은 허균이 ≪난설헌집≫을 명나라 문사들에게 유포시키는 행위에 대하여 여성이 문장에 능한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라며 못마땅히 여겼다.
沈守慶은 혹자가 여성이 문장을 짓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대해 자신은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라고 했다.
심수경은 마치 혹자의 말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남성 문단에 여성 문인이 출현했다는 식으로 기이함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洪大容과 朴趾源도 허난설헌의 이름과 글이 중국 땅에 전해진 사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선은 당시 저명한 문인과 스님의 문집 11종을 열독하고 차운시를 지었는데,
이 속에 ≪난설헌집≫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허난설헌의 시를 차운한 작품은 <次步虛詞韻>, <次靑樓曲韻>, <次出塞曲韻>, <次入塞曲韻>, <次宮詞韻>, <次遊仙詞韻> 등6수이다. 김선이 고향 나주에서 ≪난설헌집≫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역적으로 처형당한 이후에 허씨 집안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재야에서도 허균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었으나, 허균이 판각한 ≪난설헌집≫은 멀리 전라도 시골에까지 읽히는 등 전국적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설헌집≫은 각판된 출판물이라 널리 유통되어 재야 문단에서 이것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기는 힘들었겠지만, ≪난설헌집≫의 유통은 허균에 대한 금기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대부들이 허난설헌의 작품이 몹시 뛰어나다며 논평을 하거나 그녀의 작품에 대해 차운시를 짓는다고 언급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7. 결론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은 우리들이 늘상 들어왔고 널리 알고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필자는 매번 허난설헌에 관련된 글을 볼 때마다 경외와 분석의 대상으로 바뀌곤 한다.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은 매우 이채롭고 언제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 전부터 허난설헌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몇 편의 연구물을 내놓았지만, 아직까지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본 논문에서는 허난설헌 문학의 다양한 모습과 평가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보았다. 허난설헌의 이름인 초희 기록은 동생 허균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 아니고, 후인들의 손에 의해서 나왔다. 허난설헌은 집안 인물로부터 한문 공부를 배웠고, 그녀의 천부적 재능은 오라버니 허봉과 스승 격인 이달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허난설헌은 다양한 형식의 글에 솜씨를 발휘했다. 자신의 주된 전공인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산문?과체시?사에서도 뛰어났다. 허균이 ≪난설헌집≫을 편찬한 책자 외에 허난설헌의 칠언절구를 종당풍 시인들의 작품과 함께 편찬한 책자가 더 있었다.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난설헌집≫을 휴대하고 가서 명나라 문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유포시켰고, 또한 한림학사 白瑜로부터 ≪난설헌집≫ 서문을 받았다. 허균이 처형당한 얼마 후 전라도 나주에 거주하는 김선은 ≪난설헌집≫을 열독하고 허난설헌 작품의 차운시를 지었다. 당시 ≪난설헌집≫이 멀리 시골에까지 퍼져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던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근 5백년 전에 활동한 허난설헌은 오늘날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학의 모범적인 모델이다. 당시 한문학이 발달했던 한국과 중국, 일본에 허난설헌의 명성과 작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난설헌을 고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여성 문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앞으로도 허난설헌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는다.
[참고문헌]
허균 저, 李離和 편, ≪許筠全書≫, 亞細亞文化社, 서울, 1980.
民族文化推進會 역, ≪惺所覆?藁≫, 민족문화추진회, 서울, 1989., 중판
허경진 편, ≪許筠의 詩話: 鶴山樵談, 惺?詩話≫, 民音社, 서울, 1982.
장정룡 저, ≪허난설헌과 강릉≫, 강릉시, 1998.
金中淸 저, ≪苟全先生文集≫, 景仁文化社, 서울, 1997.
金璇 저, 김종섭 역, ≪市西遺稿≫, 나주시, 동신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나주, 2003.
허경진, <東詩品彙補와 허균의 科體詩>, 洌上古典硏究 14집, 열상고전연구회, 2001,
허경진, <허난설헌의 남매들>, 제6회 허균?허난설헌 학술세미나, 강릉, 2004.9.11.
구지현, <尾錄에서 발견된 허난설헌의 시에 대하여>, 洌上古典硏究 14집, 열상고전연구회, 2001.
또 김선은 ≪난설헌집≫을 읽고 난 후에 느낀 점을 시로써 남겼다. <題蘭雪齋後>에서:
허씨 집안 여인이 가장 맑고 빼어나 許家有女最淸秀
허난설헌의 시는 마치 귀신이 말하는 듯 蘭雪詩如語鬼神
시구가 비록 문사의 귀를 놀라게 하지만 詩句縱驚文士耳
베를 짜서 남편을 봉양함만 못하리 不如蠶織奉南?
이 시는 1619년(광해군 11) 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시서유고≫의 편찬 방식은 연대순으로 나열되었는데, 이 시의 다다음 시가 <己未十月十九日, 與妻共觀庭中沈菁菜>이다. 기미년은 1619년에 해당된다. 김선은 이 시에서 여성 문인에 대해 양면적인 심리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허난설헌이 허씨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문인으로 그녀의 시는 마치 귀신이 지은 듯 몹시 공교롭고 뛰어나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남성 문인들이 허난설헌의 글 솜씨를 인정하는 사실과 부합된다. 그렇지만 남성 문인들은 이내 남성 위주의 편협된 사고 방식에 젖어 허난설헌이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들은 여성의 미덕이 어디까지나 남편을 봉양하고 집안 일을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비록 허난설헌의 시가 이들의 귀를 놀라게 할 정도로 몹시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시문 창작은 어디까지나 남성 문인의 전유물이지 여성이 문장 창작 작업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서는 못마땅히 여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김선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보편적 사고 방식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앞서 논한 김중청은 허균이 ≪난설헌집≫을 명나라 문사들에게 유포시키는 행위에 대하여 여성이 문장에 능한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라며 못마땅히 여겼다.
沈守慶은 혹자가 여성이 문장을 짓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대해 자신은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라고 했다.
심수경은 마치 혹자의 말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남성 문단에 여성 문인이 출현했다는 식으로 기이함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洪大容과 朴趾源도 허난설헌의 이름과 글이 중국 땅에 전해진 사실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선은 당시 저명한 문인과 스님의 문집 11종을 열독하고 차운시를 지었는데,
이 속에 ≪난설헌집≫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허난설헌의 시를 차운한 작품은 <次步虛詞韻>, <次靑樓曲韻>, <次出塞曲韻>, <次入塞曲韻>, <次宮詞韻>, <次遊仙詞韻> 등6수이다. 김선이 고향 나주에서 ≪난설헌집≫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역적으로 처형당한 이후에 허씨 집안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재야에서도 허균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었으나, 허균이 판각한 ≪난설헌집≫은 멀리 전라도 시골에까지 읽히는 등 전국적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설헌집≫은 각판된 출판물이라 널리 유통되어 재야 문단에서 이것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기는 힘들었겠지만, ≪난설헌집≫의 유통은 허균에 대한 금기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대부들이 허난설헌의 작품이 몹시 뛰어나다며 논평을 하거나 그녀의 작품에 대해 차운시를 짓는다고 언급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7. 결론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은 우리들이 늘상 들어왔고 널리 알고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필자는 매번 허난설헌에 관련된 글을 볼 때마다 경외와 분석의 대상으로 바뀌곤 한다.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은 매우 이채롭고 언제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 전부터 허난설헌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몇 편의 연구물을 내놓았지만, 아직까지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본 논문에서는 허난설헌 문학의 다양한 모습과 평가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보았다. 허난설헌의 이름인 초희 기록은 동생 허균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 아니고, 후인들의 손에 의해서 나왔다. 허난설헌은 집안 인물로부터 한문 공부를 배웠고, 그녀의 천부적 재능은 오라버니 허봉과 스승 격인 이달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허난설헌은 다양한 형식의 글에 솜씨를 발휘했다. 자신의 주된 전공인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산문?과체시?사에서도 뛰어났다. 허균이 ≪난설헌집≫을 편찬한 책자 외에 허난설헌의 칠언절구를 종당풍 시인들의 작품과 함께 편찬한 책자가 더 있었다.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난설헌집≫을 휴대하고 가서 명나라 문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유포시켰고, 또한 한림학사 白瑜로부터 ≪난설헌집≫ 서문을 받았다. 허균이 처형당한 얼마 후 전라도 나주에 거주하는 김선은 ≪난설헌집≫을 열독하고 허난설헌 작품의 차운시를 지었다. 당시 ≪난설헌집≫이 멀리 시골에까지 퍼져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던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근 5백년 전에 활동한 허난설헌은 오늘날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학의 모범적인 모델이다. 당시 한문학이 발달했던 한국과 중국, 일본에 허난설헌의 명성과 작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난설헌을 고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여성 문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앞으로도 허난설헌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는다.
[참고문헌]
허균 저, 李離和 편, ≪許筠全書≫, 亞細亞文化社, 서울, 1980.
民族文化推進會 역, ≪惺所覆?藁≫, 민족문화추진회, 서울, 1989., 중판
허경진 편, ≪許筠의 詩話: 鶴山樵談, 惺?詩話≫, 民音社, 서울, 1982.
장정룡 저, ≪허난설헌과 강릉≫, 강릉시, 1998.
金中淸 저, ≪苟全先生文集≫, 景仁文化社, 서울, 1997.
金璇 저, 김종섭 역, ≪市西遺稿≫, 나주시, 동신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나주, 2003.
허경진, <東詩品彙補와 허균의 科體詩>, 洌上古典硏究 14집, 열상고전연구회, 2001,
허경진, <허난설헌의 남매들>, 제6회 허균?허난설헌 학술세미나, 강릉, 2004.9.11.
구지현, <尾錄에서 발견된 허난설헌의 시에 대하여>, 洌上古典硏究 14집, 열상고전연구회, 2001.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