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전탑의 정의와 특성
Ⅱ. 중국에서의 전탑의 등장
Ⅲ. 삼국 불탑의 변화와 신라 전탑의 등장
Ⅳ. 전탑의 변천과정
Ⅴ. 전탑의 구조
Ⅵ. 전탑에 대한 의문점
Ⅱ. 중국에서의 전탑의 등장
Ⅲ. 삼국 불탑의 변화와 신라 전탑의 등장
Ⅳ. 전탑의 변천과정
Ⅴ. 전탑의 구조
Ⅵ. 전탑에 대한 의문점
본문내용
은 이와 같은 중국 불탑의 영향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심초석의 형태로 사리 안치시설을 매장한 것은 목탑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불탑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에 들어온 이후 목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적 전탑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Ⅵ. 전탑에 대한 의문점
1. 백제에는 왜 전탑이 없는가?
백제와 중국 남조나 북조와의 매우 활발한 교류는 문헌과 예술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남조 양(梁)과의 교류로 공주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6호 무덤 같은 우수한 벽돌무덤을 남겼다. 또한 부여 정동리, 정암리와 청양 왕진리에서는 벽돌을 굽던 백제시대의 대규모 가마터도 확인되었다. 특히 정동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전돌은 무령왕릉 축조에 쓰였던 전돌과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암리 가마터에서는 연꽃무늬나 인동초무늬 같은 정교한 문양전돌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산수무늬전돌을 비롯한 도깨비무늬, 용과 봉황무늬 전돌들은 백제의 우수한 전돌 기술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수한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전탑은 왜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백제에 전탑이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전탑은 수명이 짧은데다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되고 인멸된 백제의 역사를 감안해 볼 때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전탑은 안동지역에만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현재 안동의 전탑들은 조선왕조시대 안동 『이민(吏民)』의 비상한 유적애호정신과 노력에 힘입어 붕괴위기를 넘겨왔으며 그 분포상황(8기) 자체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추구하거나, 더 이상 신비화시킬 이유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안동의 석질은 전탑건립에 극히 부분적으로 작용하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조탑의지를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극히 의문이다.
오히려 안동의 전탑집중설은 현존 전탑의 3/5, 특히 고려시대작으로 보여지는 신륵사 전탑을 제외한 3/4이라는 눈앞에 보이는 절대적인 수치에 너무나 쉽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순종한 결과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동의 전탑들에 대해서는 당시 안동의 불교세를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의성 탑리 석탑과 인근에 있는 빙산사지 석탑의 모방관계와 같은 현상이 안동의 전탑사이에도 있었을 것이라는데까지 착안할 수 있다면 8기라는 수치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도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위의 기술을 제외하더라도 분황사탑의 존재와 삼국유사의 석양지 관계기사만 보더라도 이미 성립하기 어려운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우방·신용철, 『탑』, 솔, 2003.
김희경, 『한국의 미술2- 탑』, 열화당, 1982.
박홍국, 『한국의 전탑연구』, 학연문화사, 1998.
장충식, 『한국의 탑』, 일지사, 1989.
황수영, 『불탑과 불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임세권, 「한국 전탑의 전래와 변천과정」『미술사학연구』, 한국미술사학회, 2004.
Ⅵ. 전탑에 대한 의문점
1. 백제에는 왜 전탑이 없는가?
백제와 중국 남조나 북조와의 매우 활발한 교류는 문헌과 예술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남조 양(梁)과의 교류로 공주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6호 무덤 같은 우수한 벽돌무덤을 남겼다. 또한 부여 정동리, 정암리와 청양 왕진리에서는 벽돌을 굽던 백제시대의 대규모 가마터도 확인되었다. 특히 정동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전돌은 무령왕릉 축조에 쓰였던 전돌과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암리 가마터에서는 연꽃무늬나 인동초무늬 같은 정교한 문양전돌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산수무늬전돌을 비롯한 도깨비무늬, 용과 봉황무늬 전돌들은 백제의 우수한 전돌 기술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수한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전탑은 왜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백제에 전탑이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전탑은 수명이 짧은데다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되고 인멸된 백제의 역사를 감안해 볼 때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전탑은 안동지역에만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현재 안동의 전탑들은 조선왕조시대 안동 『이민(吏民)』의 비상한 유적애호정신과 노력에 힘입어 붕괴위기를 넘겨왔으며 그 분포상황(8기) 자체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추구하거나, 더 이상 신비화시킬 이유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안동의 석질은 전탑건립에 극히 부분적으로 작용하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조탑의지를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극히 의문이다.
오히려 안동의 전탑집중설은 현존 전탑의 3/5, 특히 고려시대작으로 보여지는 신륵사 전탑을 제외한 3/4이라는 눈앞에 보이는 절대적인 수치에 너무나 쉽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순종한 결과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동의 전탑들에 대해서는 당시 안동의 불교세를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의성 탑리 석탑과 인근에 있는 빙산사지 석탑의 모방관계와 같은 현상이 안동의 전탑사이에도 있었을 것이라는데까지 착안할 수 있다면 8기라는 수치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도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위의 기술을 제외하더라도 분황사탑의 존재와 삼국유사의 석양지 관계기사만 보더라도 이미 성립하기 어려운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우방·신용철, 『탑』, 솔, 2003.
김희경, 『한국의 미술2- 탑』, 열화당, 1982.
박홍국, 『한국의 전탑연구』, 학연문화사, 1998.
장충식, 『한국의 탑』, 일지사, 1989.
황수영, 『불탑과 불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임세권, 「한국 전탑의 전래와 변천과정」『미술사학연구』, 한국미술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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