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본 론
Ⅰ. 김시습의 생애
(1) 김시습의 생애
(2) 김시습의 문학적 생애
(3) 김시습 방외인으로서의 삶
Ⅱ. 김시습의 사상과 문학관
(1) 사상
(2) 문학관
Ⅲ. 김시습의 작품활동
Ⅳ. 김시습의 삶에 대한 의견들
Ⅴ. <금오신화>를 통해 본 작가 김시습
Ⅵ.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을 통해 본 김시습
결 론
본 론
Ⅰ. 김시습의 생애
(1) 김시습의 생애
(2) 김시습의 문학적 생애
(3) 김시습 방외인으로서의 삶
Ⅱ. 김시습의 사상과 문학관
(1) 사상
(2) 문학관
Ⅲ. 김시습의 작품활동
Ⅳ. 김시습의 삶에 대한 의견들
Ⅴ. <금오신화>를 통해 본 작가 김시습
Ⅵ.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을 통해 본 김시습
결 론
본문내용
意期)
37~48세
정착의 실패와 방랑 생활
⑤
만년 (晩年)
49~59세
① 수학기(修學期) : 1세~20세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의 구족(舊族)으로서 세종 17년(1435) 서울 泮宮(성균관) 북쪽에서 충순 의 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8개월만에 글자를 보고 그 뜻을 알았다고 하며, 또 남 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고 하여, 집현전 학자 최치원이 기특히 여기고 그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3세까지 외조부한테서 ‘정속유학소학’ 등을 배워 글을 짓고, 5세 때 에는 이웃에 사는 修撰 李季向에게 ‘대학중용’ 등을 배워 신동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김시습이 신동이란 소문을 들은 승상 허조까지도 그를 찾아 시험해 보고는 감탄을 금하지 못 했다고 하며, 세종도 그의 재명을 듣고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에 김시습을 불러 놓고 그 허실을 시험해 보라 하였다고 하며, 또는 세종이 김시습을 친견하여 ‘삼각산시’를 짓게 하고 감 탄 끝에 명주 50필을 하사하면서 손수 가지고 나가라 하여 그 의량을 보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승정원에 들어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시습은 13세까지 대사성 김반에게 ‘맹자 시경서경춘추’ 등을 배웠고, 또 대사성 윤상에게는 ‘주역예기제사기제자백가’ 등을 배웠다고 했으니, 김시습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의 장인 김반윤상에게 사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5세 되는 해에 그의 자모를 여의고 외가의 농장으로 내려가 몸을 의탁하고 수분하던 중 3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여 오직 믿고 있던 그의 외숙모마저 운명하매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나, 이때에 부군은 중병으로 말미암아 가사를 돌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중첩하는 가정적 파란 속에서 그는 다시 계모를 맞이하였고, 이어서 훈련원 도정 남 효례의 딸을 맞아 장가도 들었으나, 그의 앞길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만 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학업 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드디어 번거로운 장안을 등지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② 방랑기 (放浪期) : 21~30세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단종이 유충으로서 등극하였다가 곧 세조에게 찬찬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21세인 시습은 대성통곡하면서 서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금강산에 들어가서 「오세암」이란 암자를 지어놓고 거처하면서 자기의 호를 「설령」이라 하니 그때가 바로 24세였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량진에서 사형을 당한 사육신의 사체를 두려워서 아무도 수습하는 이가 없는 것을 개탄하고는, 밤중에 삼각산에 서 내려와 구릉에 매장하고는 올라갔다고 하는데, 시습으로 인하여 오늘날 사육신묘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광인으로 자처한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새끼 띠를 띠고 폐양자를 쓰고는 걸반 승으로 돌아다니면서 지처에서 왕태를 연출하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서울 종로 테거리에서 판 서 서거정의 행차를 만난 그는 행차를 가로막고 「강중아 그 사이 잘 있었나」고 하였다. 서거정은 웃으면서 응대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랬다고 한다.
방랑기 때의 그의 행적과 내력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술회서인 사유록에 의하면 21세 에서 24세에 이르는 기간은 송도평양 등 관서지방을 향하였으며, 25세에서 26세에는 금강 오대 등 관동지방을, 27세에서 30세 사이에는 백제 고도 호남지방을 두루 편력하고 있다. 김시 습은 29세 되던 세조 8년(1462)에 서차 상경했다가, 효녕대군의 간청에 따라 세조의 불경언해사 업을 잠시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을 밭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영남 유람의 길을 떠나 경주의 금 오산을 찾아보고는, ‘만수궁한’을 위했던 방랑의 생활을 청산하고, 영주의 보급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금오산실을 복책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은 30세부터 37세까지 금오산실에 은거하 면서 구우의 ‘전등신화’를 탐독하고, ‘金鰲新話’를 지었을 것이다.
③ 금오기 (金鰲期) : 31~36세
김시습은 31세 되는 세조 11년(1465) 봄에 짐을 꾸려 경주로 내려가서 경주 남산 금오산 금 오산실을 복책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한다. 근는 금오산 남변 동구에 있는 용장사라 는 절간에 머물렀으며, 매월당이란 그의 서재를 근거로 하여 신라 고도와 천년유지를 널리 노닐면서 인생과 자연을 해석하고 사색한 나머지 <금오신화>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전하는 문헌으로는 금오기 이후에 그가 다시 경주로 간 흔적이 없으며, 또 이 시기 이후 의 그의 시문을 보면 매양 그가 금오산실로 가지 못하여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꿈에 그곳에 가서 놀았다는 내용의 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금오신화>의 제작연대는 금오기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의 이 금오기는 건강이 아주 좋지 못하여 병상에서 매우 신음하고 있었던 것임을 당시에 지었던 그의 시문을 통하여 짐작하게 하는 바 그 만큼 그는 한층 더 인생 과 자연을 심각하게 관찰하고 해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④ 실의기 (失意期) : 37~48세
금오산실의 생화를 끝내고 서울에 돌아와 성동의 폭천정사에 옳아 온 것이 37세 봄(유금오록)이니, 이 무렵은 시습이 정신적으로 몹시 갈등을 느끼는 때였다. 이때는 세조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즉위하여 숭유억불책을 내세워 널리 인재를 구할 무렵이다. 시습은 이러한 시대 적 변화에 편승하여 현실에 대한 긍정적 사고로 접근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뜻과 같지 못했다. 서거정김수온정창손 등 당대의 명사들을 경멸하고 모욕하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47세 때는 ‘홀장발위문이제조약부’라 하며 다시 환속하여 돌아와 조상에 제사지내고 결혼도 하였으나, 또 다시 상처를 하고 가정적으로도 불행을 겪고 사회적으로도 냉대를 받아 스스로의 경망을 후회하여 방랑의 길을 떠난다.
⑤ 만년 (晩年) : 49~59세
성종 14년 그가 49세 되는 해에 찾은 곳은 관동지방이었고, 강릉양양설악한계청평 춘천수천사탄 등지를 대경과 자사를 이끌고 편력하면서 혹은 지방정년을 교회(敎誨)하기도 하고 혹은 상산완수하면서 흥이 일면 시구와 문장으로 그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끝에
37~48세
정착의 실패와 방랑 생활
⑤
만년 (晩年)
49~59세
① 수학기(修學期) : 1세~20세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의 구족(舊族)으로서 세종 17년(1435) 서울 泮宮(성균관) 북쪽에서 충순 의 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8개월만에 글자를 보고 그 뜻을 알았다고 하며, 또 남 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고 하여, 집현전 학자 최치원이 기특히 여기고 그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3세까지 외조부한테서 ‘정속유학소학’ 등을 배워 글을 짓고, 5세 때 에는 이웃에 사는 修撰 李季向에게 ‘대학중용’ 등을 배워 신동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김시습이 신동이란 소문을 들은 승상 허조까지도 그를 찾아 시험해 보고는 감탄을 금하지 못 했다고 하며, 세종도 그의 재명을 듣고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에 김시습을 불러 놓고 그 허실을 시험해 보라 하였다고 하며, 또는 세종이 김시습을 친견하여 ‘삼각산시’를 짓게 하고 감 탄 끝에 명주 50필을 하사하면서 손수 가지고 나가라 하여 그 의량을 보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승정원에 들어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시습은 13세까지 대사성 김반에게 ‘맹자 시경서경춘추’ 등을 배웠고, 또 대사성 윤상에게는 ‘주역예기제사기제자백가’ 등을 배웠다고 했으니, 김시습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의 장인 김반윤상에게 사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5세 되는 해에 그의 자모를 여의고 외가의 농장으로 내려가 몸을 의탁하고 수분하던 중 3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여 오직 믿고 있던 그의 외숙모마저 운명하매 다시 서울로 올라왔으나, 이때에 부군은 중병으로 말미암아 가사를 돌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중첩하는 가정적 파란 속에서 그는 다시 계모를 맞이하였고, 이어서 훈련원 도정 남 효례의 딸을 맞아 장가도 들었으나, 그의 앞길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만 갔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학업 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드디어 번거로운 장안을 등지고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② 방랑기 (放浪期) : 21~30세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단종이 유충으로서 등극하였다가 곧 세조에게 찬찬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21세인 시습은 대성통곡하면서 서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금강산에 들어가서 「오세암」이란 암자를 지어놓고 거처하면서 자기의 호를 「설령」이라 하니 그때가 바로 24세였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량진에서 사형을 당한 사육신의 사체를 두려워서 아무도 수습하는 이가 없는 것을 개탄하고는, 밤중에 삼각산에 서 내려와 구릉에 매장하고는 올라갔다고 하는데, 시습으로 인하여 오늘날 사육신묘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광인으로 자처한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새끼 띠를 띠고 폐양자를 쓰고는 걸반 승으로 돌아다니면서 지처에서 왕태를 연출하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서울 종로 테거리에서 판 서 서거정의 행차를 만난 그는 행차를 가로막고 「강중아 그 사이 잘 있었나」고 하였다. 서거정은 웃으면서 응대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랬다고 한다.
방랑기 때의 그의 행적과 내력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술회서인 사유록에 의하면 21세 에서 24세에 이르는 기간은 송도평양 등 관서지방을 향하였으며, 25세에서 26세에는 금강 오대 등 관동지방을, 27세에서 30세 사이에는 백제 고도 호남지방을 두루 편력하고 있다. 김시 습은 29세 되던 세조 8년(1462)에 서차 상경했다가, 효녕대군의 간청에 따라 세조의 불경언해사 업을 잠시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을 밭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영남 유람의 길을 떠나 경주의 금 오산을 찾아보고는, ‘만수궁한’을 위했던 방랑의 생활을 청산하고, 영주의 보급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금오산실을 복책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은 30세부터 37세까지 금오산실에 은거하 면서 구우의 ‘전등신화’를 탐독하고, ‘金鰲新話’를 지었을 것이다.
③ 금오기 (金鰲期) : 31~36세
김시습은 31세 되는 세조 11년(1465) 봄에 짐을 꾸려 경주로 내려가서 경주 남산 금오산 금 오산실을 복책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한다. 근는 금오산 남변 동구에 있는 용장사라 는 절간에 머물렀으며, 매월당이란 그의 서재를 근거로 하여 신라 고도와 천년유지를 널리 노닐면서 인생과 자연을 해석하고 사색한 나머지 <금오신화>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전하는 문헌으로는 금오기 이후에 그가 다시 경주로 간 흔적이 없으며, 또 이 시기 이후 의 그의 시문을 보면 매양 그가 금오산실로 가지 못하여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꿈에 그곳에 가서 놀았다는 내용의 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금오신화>의 제작연대는 금오기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의 이 금오기는 건강이 아주 좋지 못하여 병상에서 매우 신음하고 있었던 것임을 당시에 지었던 그의 시문을 통하여 짐작하게 하는 바 그 만큼 그는 한층 더 인생 과 자연을 심각하게 관찰하고 해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④ 실의기 (失意期) : 37~48세
금오산실의 생화를 끝내고 서울에 돌아와 성동의 폭천정사에 옳아 온 것이 37세 봄(유금오록)이니, 이 무렵은 시습이 정신적으로 몹시 갈등을 느끼는 때였다. 이때는 세조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즉위하여 숭유억불책을 내세워 널리 인재를 구할 무렵이다. 시습은 이러한 시대 적 변화에 편승하여 현실에 대한 긍정적 사고로 접근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뜻과 같지 못했다. 서거정김수온정창손 등 당대의 명사들을 경멸하고 모욕하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47세 때는 ‘홀장발위문이제조약부’라 하며 다시 환속하여 돌아와 조상에 제사지내고 결혼도 하였으나, 또 다시 상처를 하고 가정적으로도 불행을 겪고 사회적으로도 냉대를 받아 스스로의 경망을 후회하여 방랑의 길을 떠난다.
⑤ 만년 (晩年) : 49~59세
성종 14년 그가 49세 되는 해에 찾은 곳은 관동지방이었고, 강릉양양설악한계청평 춘천수천사탄 등지를 대경과 자사를 이끌고 편력하면서 혹은 지방정년을 교회(敎誨)하기도 하고 혹은 상산완수하면서 흥이 일면 시구와 문장으로 그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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