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대첩지 - 성웅 이순신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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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 대첩지 - 성웅 이순신의 전쟁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소개의 글

1. 첫승리- 옥포 대첨

2. 거북선의 출동

3. 당포해전

4. 당항포해전

5. 한산대첩-학익진

6. 부산포대첩

7. 삼도수군 통제사

8. 백의종군

9. 유성룡의 실각

10. 명량대첩

11. 노량대첩

본문내용

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노량대첩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지 않은 줄로 알고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참고문헌
◈ 김성근, '한반도 생존전략의 역사적 고찰', 국방대 석사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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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권석, '임병양난기 인물전의 비극성 연구: 김덕령·임경업·이순신의전을 중심으로', 우석대 박사논문, 1997.
◈ 이기식,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전략 사상에 관한 연구', 경남대 석사논문,1997.
◈ 김영숙, '충무공 이순신 연구', 경희대 박사논문, 1993.
◈ 김정진, '한국유학의 효열충신 사상 연구 : 민족정기와 국난극복 정신을 중심으로', 부산대 박사논문, 1992.
◈ 박춘자, '조선수군 통제영 연구 : 경상수영을 중심으로', 충남대 석사논문, 1992.
◈ 조원래, '임란 호남의병에 관한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1991.
◈ 임철호, '임진록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86.
◈ 소재영, '임진록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80.
◈ 주창활, '임진왜란과 이순신', 경희대 석사논문, 1978.
◈ 고 순, '어린이용 한국위인전에 관한 일연구' , 이화여대 석사논문, 1974.
키워드 이순신, 한산대첩, 해전사, 임진왜란, 원균, 도요도미 히데요시, 야시나카, 우성룡
역사학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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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22
  • 저작시기2006.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4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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