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의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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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崔承老의 生涯와 思想的 基盤
2. 時務二十八條를 통해본 政治思想
1) 봉정의도
2) 時務二十八條를 통해 본 政治思想
ⅰ)上書文의 儒經인용을 통해서 본 政治思想
ⅱ) 崔承老의 思惟構造 및 佛敎觀
ⅲ) 對中國觀

Ⅲ. 結論
※ 參考文獻

본문내용

. 이것은 그로 하여금 과도기의 政治的 風浪 속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그가 보아온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이를 냉정하게 觀察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崔承老의 政治思想 形成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가 살아온 삶은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新羅에서 태어나 後三國時代라는 역사적 轉換期와 高麗라는 새로운 王朝의 건설 그리고 6代王을 거치면서 특히, 시종 불안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光宗代 등 그는 일련의 이러한 生涯를 살아오면서 政治思想은 形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崔承老 자신의 政治思想 形成에 정확한 이해는 光宗을 빠뜨리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崔承老의 사상적 基調에는 光宗의 영향과 光宗과의 관계가 하나의 核心的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光宗의 재위 기간은 26년(949∼975) 이었고 崔承老의 생애는 927∼989였음을 고려한다면, 청·장년기에 形成되었을 사상적 基盤은 역시 光宗代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後述 하겠으나 光宗代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後周의 雙冀를 등용하여 科擧制를 시행하였고, 奴婢按檢法을 비롯, 철저한 피의 숙청을 통한 王權强化策을 펴나갔다. 이는 舊時代의 政治勢力을 억압하는 政策과 儒敎的 소양과 지식을 갖춘 인재의 양성과 그러한 관리를 등용함으로써 政·敎 양면에 있어서 새로운 政治的·社會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의 연속이었다. 崔承老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政治思想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雙冀라는 귀화인의 得勢는 文化的 自尊意識을 가진 그에게는 상당히 못마땅한 것으로 받아 졌을 것이며, 무엇보다 거듭된 피의 숙청 속에 生命을 겨우 扶持하는 衝擊的인 경험이 崔承老 자신의 政治思想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 時務二十八條를 통해본 政治思想
1) 봉정의도
崔承老는 上書文 서두에서『貞觀政要』를 말하는 가운데, 상서문 봉정 의도는 吳兢이 『貞觀政要』를 올린 의도와 같다고 하였다. 상서문은 『貞觀政要』와 마찬가지로 統治者의 자세와 통치자와 그 보조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논한 구절이 많다. 통치자의 修身과 君臣間의 원만한 관계를 중점적으로 논한 이유는, 군왕이 君主中心的 내지 君主獨斷的 專制政治를 행사하지 말고 賢臣들을 등용해서 그들이 건의한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통치를 해나가는 '君臣和合政治'를 천명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요컨대 崔承老는 唐 태종이 賢臣들을 등용하여 유교 도덕에 입각한 통치, 이른바 宰相政治를 시행한 것처럼, 고려에 있어서는 유교 정치사상으로 무장한 崔承老와 또 그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등용하여 이들을 예우 하면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2) 時務二十八條를 통해 본 政治思想
崔承老의 上書文에 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上書文은 각기 다른 봉투에 넣어서 올려진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五祖政績評으로써 成宗 이전의 다섯 임금 즉 太祖·惠宗·定宗·光宗·景宗의 정치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그들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가려서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왕에 대해서든 거울삼을 만한 장점과 경계해야 할 단점과를 아울러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에 太祖의 대해서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제도가 미비했다는 정도의 비판적 언급을 빼고는 칭찬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光宗에 대해서는, 卽位 初 8년 간의 정치를 제외하면 비판적인 언사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평가 근저는 그가 이상으로 추구하는 군주상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上書文의 둘째 부분은 成宗에게 건의한 구체적인 時務策 즉 당면한 시책 혹은 개혁안이었다. 원래 28조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2조목만이 전한다. 22조목의 개혁안은 각기 모두 먼저 현재의 부당한 현실을 제시하고 끝에서 '바라건대'(願·伏望)·'청컨대'(請)라고 하여 그러한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시무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 현실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崔承老가 바라는 이상적인 國家像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時務二十八條에 나타난 그의 政治思想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ⅰ)上書文의 儒經인용을 통해서 본 政治思想
崔承老는 佛經은 한번도 인용하지 않은 반면, 儒經은 자주 거론하였다. 그런데 그는 儒經을 인용함에 있어 자신의 政治思想論理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구절만을 선별적으로 인용하였다. 따라서 그가 선택적·의도적으로 사용한 儒經 구절을 분석해보면, 그의 政治思想이 어떠한 것인가를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崔承老가 인용하고 있는 儒經은 『論語·』『書經』·『春秋』·『禮記』·『周易』·『孟子』 등이다. 상서문 에는 이밖에도 漢書·梁書·南史·文選 등 사서와 문학서가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 범위가 文·史·哲 분야를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崔承老가 論語·書經·春秋 등의 儒經을 주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결국 그의 사상적 기반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논어·효경, 그리고 오경(시경·서경·주역·춘추·예기)을 중심과목으로 채택하였던 新羅 國學과 高麗의 國子監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五經中 詩經을 원용하지 않은 것은 고려 초기가 정치적 격변기였던 만큼 이러한 시대 상황에 영향 받은 그로서는 고려 중·후기의 유학자 관료들과는 달리 文章가로서보다는 정치사상가 내지 경세가로서의 측면에 부심할 수밖에 없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그는 군왕의 개인적 修身과 君臣의 원만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 주로 書經을 인용하였다. 서경에 보이는 政治思想은 크게 보아 대체로 民本思想과 賢人思想을 들 수 있다. 그런데 崔承老가 서경에서 따온 구절들은 대체로 賢人思想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군왕은 현인의 도움을 받아 통치를 해나가야 한다는 현인 사상은 인재, 즉 현신을 중시할 경우에 尊賢사상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上書文 에서 崔承老가 거론한 서경의 구절은 尊賢思想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군왕은 人·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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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13
  • 저작시기2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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