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덕수궁 약사
Ⅱ.궁궐의 배치
Ⅲ. 역사속의 덕수궁
Ⅳ. 현재를 사는 우리들과 덕수궁
Ⅴ. 결론
Ⅱ.궁궐의 배치
Ⅲ. 역사속의 덕수궁
Ⅳ. 현재를 사는 우리들과 덕수궁
Ⅴ. 결론
본문내용
대상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전을 보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안을 포기하고 국제연합(UN)에 한국문제를 이관시키고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 측에서는 소련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고 10월 21일 평양으로 떠남으로써 2년여에 걸쳐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Ⅳ. 현재를 사는 우리들과 덕수궁
21세기를 사는 현재 세대들에게 있어 덕수궁이 중요하거나 큰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얼핏 보거나 데이트 코스, 또는 유년기에 소풍을 왔던 곳 정도로 생각을 할 것이다. 덕수궁에 관한 우리 조의 발표를 들으시고 좀 더 덕수궁에 대한 이해와 보는 시야가 넓어지셨으리라 믿는다. 지금부터는 덕수궁에 관한 최근의 현황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살펴보겠다.
몇 년 전에 옛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신축한다는 것이 큰 논란거리가 됐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선 공약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내놓을 정도로 큰 논쟁거리였다. 처음엔 정부와 서울시에서 서울 정동 덕수궁 터 (옛 경기여고 자리)에 미국 대사관과 관련 숙소를 짓는 것을 허가 했다가 여러 시민단체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지표 조사 결과 몇몇 유물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올해 초에야 용산 미군기지에 신축하도록 미국과 협상함으로써 다행히 덕수궁 터는 보존하게 된다. 이 문제 때문에 반미감정이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때 미국은 정당한 재산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미국은 1986년 서울시와 체결된 재산교환 양해각서를 통해 이 일대의 부지를 확보한 뒤 건립을 추진해 오다가 신축 발표를 하자 그때서야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반환되는 부지의 2배가 넘는 땅을 제공하고 나서야 미국과 합의를 보게 되고 그 후에 뒤늦게나마 반환된 땅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복원하도록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저희가 반성해야 할 것은 1986년에 체결된 계약을 2002년 공사 발표를 할 때까지 "16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다. 덕수궁 돌담에 기형적으로 파고들어서 흉물스럽다고 지적 받은 태평로 파출소를 34년이 지나서야 철거 시키고 돌담으로 복원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인 중명전은 정동극장의 주차장으로 방치되어 쓰레기와 오물로 뒤 덥혀져 있다. 최근 옛 문화 유적에 대한 관심과 보존 의식이 높아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아직까지 반성하고 고쳐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정부의 안일한 대책도 문제점이지만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미국 측의 주장도 어처구니가 없다. 15층짜리 대사관과 8층짜리 아파트를 아무리 현 덕수궁 돌담과 떨어뜨려 짓는다 해도 그곳은 역시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사적지 저촉을 받을 뿐이다. 미국 측은 대외 상징인 미국 대사관 관련 건물을 짓겠다고 하면서 해당 국가의 법과 전통 그리고 자존심을 무시하고, 단순히 법적 소유권행사를 하겠다는 자세로만 나오고 있는 것은 명백히 국제협약 위반이다.
덕수궁 석조전이 건립 100년 만에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번 석조전 개-보수 공사는 문화 재청이 추진 중인 덕수궁 정비 계획의 일환으로 약 3년에 걸쳐 공사를 한다. 본격적인 개-보수 작업은 이번 11월 달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그 전에 현장 답사를 다녀온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번 공사를 두고 덕수궁 석조전의 활용 방안을 놓고 미술계와 문화재청이 대립하고 있다.
미술계측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석조전 동관을 덕수궁미술관에 통합할 경우 기존의 서관은 기획전시실과 수장고, 세미나 실 등으로 사용하고 동관은 근대미술전시실과 자료실, 작품 수복실 등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입니다. 이 경우 고미술 중심의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을 잇는 근 현대 미술 중심의 입체적 전시공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미술계에서는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 독일 샤를로 텐부르크, 네덜란드 마우리츠 하위스 등 옛 왕실의 건축물을 개조한 유럽의 유수 미술관을 사례로 들면서 동, 서관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석조전 자체가 대한 제국 기에 완성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근대미술품이라는 점과 애초부터 미술관 전용 건축물이라는 점을 들어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반면 문화재청은 석조전을 지을 당시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과 홀, 3층은 침실과 욕실 등으로 사용된 만큼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현재 공사 중인 대한문, 반환이 확정된 미대사관 저 부지 등과 연계된 덕수궁 종합복원계획에 따라 석조전 보수공사가 이뤄지기 때문에 근대미술관 활용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Ⅴ. 결론
가장 뒤늦게 조선의 궁궐로 편입된 덕수궁은 근대화로 가는 아픔을 모두 함께했다. 특히 서양 열강들에 의해 이리저리 부지를 넘겨주어야만 했던 덕수궁은 근대로 넘어오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어느덧 닮아 현재도 열강의 대사관과 고층 빌딩들에 둘러쌓여 숨쉬기 힘들어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의 위엄은 간데없고 이제 도심속 시민들의 휴식처 이상의 기능은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덕수궁이 함께 겪었던 근대의 아픔은 잊어서는 않된 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역사에 다시는 그런 모습이 없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무 의미 없이 거닐던 시청 앞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 일대는 그렇게 고즈넉이 서글프게 앉아 있는 덕수궁이 있다는 것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궁』, 신영훈, 열화당, 2005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 2004
『조선의 궁궐』, 신영훈, 한국일보사, 1998
『근대건축기행』, 김정동, 푸른역사, 1999
『신궁궐기행』, 이덕수, 대원사, 2004
『서울 근 현대 역사기행』, 정재정, 염인호, 장규식, 혜안, 1998
『서울의 고궁산책』, 허균, 효림, 1994
『덕수궁』, 김순일, 대원사, 1991
『한국학보』, 「1904~1906년 慶運宮 重建과 《慶運宮重建都監儀軌》」, 한영우. 2002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전을 보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안을 포기하고 국제연합(UN)에 한국문제를 이관시키고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 측에서는 소련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고 10월 21일 평양으로 떠남으로써 2년여에 걸쳐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Ⅳ. 현재를 사는 우리들과 덕수궁
21세기를 사는 현재 세대들에게 있어 덕수궁이 중요하거나 큰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얼핏 보거나 데이트 코스, 또는 유년기에 소풍을 왔던 곳 정도로 생각을 할 것이다. 덕수궁에 관한 우리 조의 발표를 들으시고 좀 더 덕수궁에 대한 이해와 보는 시야가 넓어지셨으리라 믿는다. 지금부터는 덕수궁에 관한 최근의 현황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살펴보겠다.
몇 년 전에 옛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신축한다는 것이 큰 논란거리가 됐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선 공약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내놓을 정도로 큰 논쟁거리였다. 처음엔 정부와 서울시에서 서울 정동 덕수궁 터 (옛 경기여고 자리)에 미국 대사관과 관련 숙소를 짓는 것을 허가 했다가 여러 시민단체와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지표 조사 결과 몇몇 유물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올해 초에야 용산 미군기지에 신축하도록 미국과 협상함으로써 다행히 덕수궁 터는 보존하게 된다. 이 문제 때문에 반미감정이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때 미국은 정당한 재산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미국은 1986년 서울시와 체결된 재산교환 양해각서를 통해 이 일대의 부지를 확보한 뒤 건립을 추진해 오다가 신축 발표를 하자 그때서야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반환되는 부지의 2배가 넘는 땅을 제공하고 나서야 미국과 합의를 보게 되고 그 후에 뒤늦게나마 반환된 땅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복원하도록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저희가 반성해야 할 것은 1986년에 체결된 계약을 2002년 공사 발표를 할 때까지 "16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다. 덕수궁 돌담에 기형적으로 파고들어서 흉물스럽다고 지적 받은 태평로 파출소를 34년이 지나서야 철거 시키고 돌담으로 복원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인 중명전은 정동극장의 주차장으로 방치되어 쓰레기와 오물로 뒤 덥혀져 있다. 최근 옛 문화 유적에 대한 관심과 보존 의식이 높아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아직까지 반성하고 고쳐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정부의 안일한 대책도 문제점이지만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미국 측의 주장도 어처구니가 없다. 15층짜리 대사관과 8층짜리 아파트를 아무리 현 덕수궁 돌담과 떨어뜨려 짓는다 해도 그곳은 역시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사적지 저촉을 받을 뿐이다. 미국 측은 대외 상징인 미국 대사관 관련 건물을 짓겠다고 하면서 해당 국가의 법과 전통 그리고 자존심을 무시하고, 단순히 법적 소유권행사를 하겠다는 자세로만 나오고 있는 것은 명백히 국제협약 위반이다.
덕수궁 석조전이 건립 100년 만에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번 석조전 개-보수 공사는 문화 재청이 추진 중인 덕수궁 정비 계획의 일환으로 약 3년에 걸쳐 공사를 한다. 본격적인 개-보수 작업은 이번 11월 달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그 전에 현장 답사를 다녀온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번 공사를 두고 덕수궁 석조전의 활용 방안을 놓고 미술계와 문화재청이 대립하고 있다.
미술계측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석조전 동관을 덕수궁미술관에 통합할 경우 기존의 서관은 기획전시실과 수장고, 세미나 실 등으로 사용하고 동관은 근대미술전시실과 자료실, 작품 수복실 등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입니다. 이 경우 고미술 중심의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을 잇는 근 현대 미술 중심의 입체적 전시공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미술계에서는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 독일 샤를로 텐부르크, 네덜란드 마우리츠 하위스 등 옛 왕실의 건축물을 개조한 유럽의 유수 미술관을 사례로 들면서 동, 서관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석조전 자체가 대한 제국 기에 완성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근대미술품이라는 점과 애초부터 미술관 전용 건축물이라는 점을 들어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반면 문화재청은 석조전을 지을 당시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과 홀, 3층은 침실과 욕실 등으로 사용된 만큼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현재 공사 중인 대한문, 반환이 확정된 미대사관 저 부지 등과 연계된 덕수궁 종합복원계획에 따라 석조전 보수공사가 이뤄지기 때문에 근대미술관 활용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Ⅴ. 결론
가장 뒤늦게 조선의 궁궐로 편입된 덕수궁은 근대화로 가는 아픔을 모두 함께했다. 특히 서양 열강들에 의해 이리저리 부지를 넘겨주어야만 했던 덕수궁은 근대로 넘어오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어느덧 닮아 현재도 열강의 대사관과 고층 빌딩들에 둘러쌓여 숨쉬기 힘들어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의 위엄은 간데없고 이제 도심속 시민들의 휴식처 이상의 기능은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덕수궁이 함께 겪었던 근대의 아픔은 잊어서는 않된 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역사에 다시는 그런 모습이 없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무 의미 없이 거닐던 시청 앞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 일대는 그렇게 고즈넉이 서글프게 앉아 있는 덕수궁이 있다는 것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궁』, 신영훈, 열화당, 2005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 2004
『조선의 궁궐』, 신영훈, 한국일보사, 1998
『근대건축기행』, 김정동, 푸른역사, 1999
『신궁궐기행』, 이덕수, 대원사, 2004
『서울 근 현대 역사기행』, 정재정, 염인호, 장규식, 혜안, 1998
『서울의 고궁산책』, 허균, 효림, 1994
『덕수궁』, 김순일, 대원사, 1991
『한국학보』, 「1904~1906년 慶運宮 重建과 《慶運宮重建都監儀軌》」, 한영우.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