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하이데거와 정치
3. 하이데거와 종교
4.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2. 하이데거와 정치
3. 하이데거와 종교
4. 수수께끼의 하이데거
본문내용
쳐 오는 것처럼 이해될 지경이었다.24) 이러한 사상의 자기이해(자명성)에서부터 비로소 우리는 또한 하이데거가 자신이 쓰고 말한 낱말을 "관리하는" 태도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청중과 독자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개인적인 대화에서 이야기하는 방식과 그의 강의와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편으로 대화에서는 단순함, 용어사용에서의 자유로움이 보이고 있고, 그 중간쯤 강의 스타일이 놓인다 할 수 있고, 다른 편으로 강연과 저서에서는 극단적으로 응축된, 용어에 있어 정화주의적이고, 때로는 화려하고 갈고 다듬은 말들이, 아무튼 대단히 인위적으로 구성된 말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말해진 것과 침묵되고 있는 것과의 관계이다.25) 인쇄되기에 충분한 원고들을 20년 또는 30년 동안 발표하지 않고 놔두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것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원고를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가까워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라니 말이다. 내가 1971년 그의 저서 중 어떤 저서에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그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록을 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책을 댈 것으로 기대했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강연과 논문모음집}의 가운데 실린 글들을 지적하였다. 갑자기 수줍어진 듯한 목소리의 그의 대답은 놀라웁기도 했고 전형적으로 그다운 대답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나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 그래 그것이 본래 중요한 것이지." 하이데거는 그것을 그렇게 직접 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또한 {동일성과 차이}이기도 하단다. 거기에서 그는 "고양이를 자루에서 가장 멀리 꺼내 놓았다. 그러나 그것도 전부는 아니지"!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순진함에, 수수께끼 속에 포장하는 지혜에 때때로 너무나도 인간적인 경제적 계산이 섞여들기도 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일까? 그래서 나에게는 하이데거와의 씨름이 시작된 이래 언제나 거듭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되어 왔다: 하이데거는 독자에게 개방되어 있는가? 그는 언제나 솔직한가?26) 둘째로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해야 겠다. 하이데거의 강의는 그 당시 몹시 매혹적이었고 그의 저서들는 오늘날도 아직 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을 느낀다. 그의 청중들에게 하이데거는 사상가적인 자연의 사건과 같이, 화산의 폭발과 같이, 강력하고 위압적으로 압도해 왔다. 그의 물음의 대단히 비상한 힘에 압도당해, 또는 다른 종류의 함께 떠내려가는 듯한 급류 속에서 제자들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듯이, 그 모든 부유해짐 속에서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때문에) 자신이 자유롭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하이데거의 가까운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그러한 압도적인 힘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모든 다양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언제나 거듭 그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물음과 존재의 자립성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많은 하이데거화되고 있는 신학자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그의 인격성에서, 그의 데몬에서 도주할 수가 없었다. 끝으로 하이데거의 사상과 참다운 관계를 갖는 데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자들에게 통용되는 것, 즉 그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오직 오래 지속되는 노력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열어밝혀진다는 이것은 하이데거에게도 그대로 탁월한 의미에서 적용된다. 그의 충실한 제자이며 친구인 쟝 보프레(Jean Beaufret)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랫 동안을 그는 이제 조금 더 노력하면 하이데거를 이해하게 되겠지 하는 희망 속에 살아 왔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항상 다시 예기치 않은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하이데거가 사유하고 있는 그 문제들이란 실제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배후에 남아있는 그러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텍스트만을 읽어서는 그 밑바탕에 놓여있는 문제제기를 파악하는 데 성공할 수 없다... 독자들에게 있어 주된 어려움은 처음부터 도대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의 이해를 위한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거기에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전수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전수된 언어는 청중 내지는 독자의 주목을 하이데거가 바로 그 주목을 거기에서부터 돌려놓으려는 바로 그 방향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27) 하이데거의 "사상"은 더이상 고전 "철학"처럼 가르칠 수 있는 명백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의 사상은 초기의 작품에서는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인 숙고의 형태를 - {존재와 시간}도 이것에 다름 아니다 -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형태 자체가 이미 본래적인 인식함의 한 형태여야 한다. 나중에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을 하나의 물음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더 "사실"에 맞갖은 물음을 준비하는 데에만 그 의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 사상과 가능한 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그 자신이 (넓은 의미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이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이 - 그것이 고전 형이상학의 전통이든 또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전통이든 또는 좌익 헤겔주의의 전통이든 교회의 구조의 전통이든 - 계속해서 그들에게 확고한 바탕을 의미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하이데거는 위험한 반동분자(퇴폐분자)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에게 있어 진리는 어쨌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고 철학에서도 그저 새로운 것만을 찾아서 동분서주하며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하이데거는 매우 흥미있는 현상이겠지만 결국에 가서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28) 오직 - 전통의 내부나 밖에 서 있으면서 - 우리가 오늘날 처해있는 그 심각한 위기를 느낀 그러한 사람들만이 하이데거의 추구를 규정하고 있는 그 분위기를 함께 나눌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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