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묘안으로 언론은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말』의 '보도지침' 폭로
전두환 정권은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언론사에게 매일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하고자 했다. 이 보도지침은 해직기자들로 구성된 민주언론협의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말'지에 의해 폭로되었다.
김주언, 김태흥, 신흥범의 활약
권인숙-박종철-이한열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른 왜곡된 보도만을 내보냈다. 게다가 촌지까지 받았다.
『조선일보』의 아첨이 만들어낸 4·13호헌 조치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라는 오판은 조선일보와 같은 언론의 아첨과 무관하지 않다. 전두환은 민심을 오판한 것.
5공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일보』
이처럼 전두환 정권하에서 전 정권의 정당화와 예찬에 가장 앞장 선 신문은 조선일보였는데, 조선일보가 이 기간 중 가장 큰 성장을 했다는 건 권언유착이 신문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권언유착을 신문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재미를 본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권력창출에 앞장서는 정치신문으로 작용함.
노태우 정권하의 언론 (1987~1993)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198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의 분열과 부정·불공정 선거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
언론자유 확대와 양적팽창
전두환 정권의 정당화와 홍보에 앞장섰던 언론은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의 당선에 한시름 놓았다. 나중에 전두환이 부정당할 때마다 물어뜯긴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실질적인 군사정권이었다. 하지만 민주화라고 하는 시대적 대세에 순응해서 언론 자유를 어느 정도 확대했다.
언론사 내부 민주화와 『한겨례 신문』의 창간
부산일보사- 파어에 들어가 최초의 언론 노조 파업을 기록하면서 결국 편집국장 추천제를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언론사 내부의 민주화는 다른 언론사들로 파급되었다.
한겨례신문-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기여하는 '민주언론', 민족 자주화에 의한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노력을 하는 '민족언론', 이 나라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소외당하고 고난받는 민중의 생존권을 확보해주고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민중언론'이 될 것을 선언함.
언론청문회와 언론인 개별접촉 보고서
청문회 등을 신설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가 열렸다. 전두환의 악행이 청산의 대상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언노련 탄생과 언론민주화운동
언론노동자의 결집체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탄생하여 언론민주화운동은 노조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방송계에서는 노조를 중심으로 신문에 비해 더욱 적극적인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KBS 4월 투쟁
언론계의 민주화 운동은 사영 기업으로 존재하는 신문보다는 공영방송 쪽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kbs투쟁의 노정권의 무력진압은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변화로 가능한 것이었다. 김영삼이 야권 내에서 김대중의 그늘에 가리게 되자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변절을 함.
서울올림픽과 신문의 증면 경쟁
서울올림픽은 언론에겐 '특수 올림픽'이었다. 신문들은 올림픽 특수를 광고 수익과 연결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증면을 시작했다. 이는 지면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벌의 신문 소유와 민영방송 탄생
노정권하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벌들의 신문 소유가 크게 늘어났다.
SBS-TV는 MBC와 KBS가 갖고 있던 무사안일주의에 자극을 준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나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촉발시켜 한국 방송의 오락 편향성을 강화했다.
'김중배 선언'과 '국가안보 상업주의'
노정권 치하에서 언론이 당면한 진정한 문제는 더 이상 권력의 언론통제가 아니었다. 언론의 언론 통제가 더 큰 문제였다. 동아일보 김중배 편집국장은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에 접어 들었다"고 선언했다. 이는 언론을 보는 언론자본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화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문들이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면서 경제적 규모가 커지자 자본논리의 지배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뜻 이었다.
노 정권하에서 더욱 철저해진 신문의 자본 논리가 만들어낸 최악의 모습은 양비론과 국가안보 상업주의였다.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신문들은 양비론으로 국민의 정치 혐오주의를 부추겼으며, 공안정국이 형성될 기미가 보이면 국가 안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위기를 창출하고 고조시키는 작태를 일삼았다.
부패에 찌든 언론의 생존 감각
과거 기자들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취재원으로부터 촌지를 받았지만 이제 기자들이 받는 촌지는 더 이상 생존형 부패가 아니라 향략형 부패 또는 축재형 부패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YS장학생'과 『조선일보』의 '대통령 만들기'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정권기반을 다졌던 여당은 완전히 제외한 채 호남만 거론.
김영삼 정권하의 언론 (1993~1998)
여론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못 참는 김영삼
김영삼 정권의 언론개혁 프로젝트
'낮의 대통령'을 관리한 '밤의 대통령'
ABC, 케이블 TV, 지역민방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의 전쟁
'언론계 전두환 장학생'
『독립신문』창간 100돌과 언론개혁 10대 과제
IMF 사태 주범이 저지른 언권 선거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의 도덕적 파탄
언론권력의 도전
'서바이벌 게임'에 들어선 언론
신문을 많이 팔수록 손해본다
미쳐 돌아간 윤전기 도입 경쟁
우려되는 일부 언론의 여론 독점
김대중 정권하의 언론 (1998~2000)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권력창출 시도
언론의 '신 DJ 죽이기'
지역감정 선동에 혈안이 된 언론
김대중 정권의 구태의연한 언론과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출범
언론의 주식 투자와 보도의 악용
여전한 촌지와 향응
통합 방송법의 제정
영화와 비디오
인터넷 매체의 성장
1999년 언론 통계
4·13 총선과 지역주의
『말』의 '보도지침' 폭로
전두환 정권은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언론사에게 매일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하고자 했다. 이 보도지침은 해직기자들로 구성된 민주언론협의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말'지에 의해 폭로되었다.
김주언, 김태흥, 신흥범의 활약
권인숙-박종철-이한열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른 왜곡된 보도만을 내보냈다. 게다가 촌지까지 받았다.
『조선일보』의 아첨이 만들어낸 4·13호헌 조치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라는 오판은 조선일보와 같은 언론의 아첨과 무관하지 않다. 전두환은 민심을 오판한 것.
5공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선일보』
이처럼 전두환 정권하에서 전 정권의 정당화와 예찬에 가장 앞장 선 신문은 조선일보였는데, 조선일보가 이 기간 중 가장 큰 성장을 했다는 건 권언유착이 신문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권언유착을 신문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재미를 본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권력창출에 앞장서는 정치신문으로 작용함.
노태우 정권하의 언론 (1987~1993)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198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의 분열과 부정·불공정 선거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
언론자유 확대와 양적팽창
전두환 정권의 정당화와 홍보에 앞장섰던 언론은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의 당선에 한시름 놓았다. 나중에 전두환이 부정당할 때마다 물어뜯긴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실질적인 군사정권이었다. 하지만 민주화라고 하는 시대적 대세에 순응해서 언론 자유를 어느 정도 확대했다.
언론사 내부 민주화와 『한겨례 신문』의 창간
부산일보사- 파어에 들어가 최초의 언론 노조 파업을 기록하면서 결국 편집국장 추천제를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언론사 내부의 민주화는 다른 언론사들로 파급되었다.
한겨례신문-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기여하는 '민주언론', 민족 자주화에 의한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노력을 하는 '민족언론', 이 나라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소외당하고 고난받는 민중의 생존권을 확보해주고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민중언론'이 될 것을 선언함.
언론청문회와 언론인 개별접촉 보고서
청문회 등을 신설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가 열렸다. 전두환의 악행이 청산의 대상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언노련 탄생과 언론민주화운동
언론노동자의 결집체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탄생하여 언론민주화운동은 노조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방송계에서는 노조를 중심으로 신문에 비해 더욱 적극적인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KBS 4월 투쟁
언론계의 민주화 운동은 사영 기업으로 존재하는 신문보다는 공영방송 쪽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kbs투쟁의 노정권의 무력진압은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변화로 가능한 것이었다. 김영삼이 야권 내에서 김대중의 그늘에 가리게 되자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변절을 함.
서울올림픽과 신문의 증면 경쟁
서울올림픽은 언론에겐 '특수 올림픽'이었다. 신문들은 올림픽 특수를 광고 수익과 연결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증면을 시작했다. 이는 지면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벌의 신문 소유와 민영방송 탄생
노정권하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벌들의 신문 소유가 크게 늘어났다.
SBS-TV는 MBC와 KBS가 갖고 있던 무사안일주의에 자극을 준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나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촉발시켜 한국 방송의 오락 편향성을 강화했다.
'김중배 선언'과 '국가안보 상업주의'
노정권 치하에서 언론이 당면한 진정한 문제는 더 이상 권력의 언론통제가 아니었다. 언론의 언론 통제가 더 큰 문제였다. 동아일보 김중배 편집국장은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에 접어 들었다"고 선언했다. 이는 언론을 보는 언론자본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화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문들이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면서 경제적 규모가 커지자 자본논리의 지배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뜻 이었다.
노 정권하에서 더욱 철저해진 신문의 자본 논리가 만들어낸 최악의 모습은 양비론과 국가안보 상업주의였다.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신문들은 양비론으로 국민의 정치 혐오주의를 부추겼으며, 공안정국이 형성될 기미가 보이면 국가 안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위기를 창출하고 고조시키는 작태를 일삼았다.
부패에 찌든 언론의 생존 감각
과거 기자들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취재원으로부터 촌지를 받았지만 이제 기자들이 받는 촌지는 더 이상 생존형 부패가 아니라 향략형 부패 또는 축재형 부패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YS장학생'과 『조선일보』의 '대통령 만들기'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정권기반을 다졌던 여당은 완전히 제외한 채 호남만 거론.
김영삼 정권하의 언론 (1993~1998)
여론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못 참는 김영삼
김영삼 정권의 언론개혁 프로젝트
'낮의 대통령'을 관리한 '밤의 대통령'
ABC, 케이블 TV, 지역민방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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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주식 투자와 보도의 악용
여전한 촌지와 향응
통합 방송법의 제정
영화와 비디오
인터넷 매체의 성장
1999년 언론 통계
4·13 총선과 지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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