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소크라테스 개요
Ⅲ. 악법도 법이다
1.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2. 소크라테스는 악법을 지키려고 죽은 사람이 아니다
3.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
Ⅳ. 소크라테 언행의 일관성
1. 크리톤의 권유
2. 소크라테스의 답변
3. 국법 및 나라와의 대화
Ⅴ. 소크라테스의 철학
Ⅵ. 결론
Ⅱ. 소크라테스 개요
Ⅲ. 악법도 법이다
1.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2. 소크라테스는 악법을 지키려고 죽은 사람이 아니다
3.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
Ⅳ. 소크라테 언행의 일관성
1. 크리톤의 권유
2. 소크라테스의 답변
3. 국법 및 나라와의 대화
Ⅴ. 소크라테스의 철학
Ⅵ. 결론
본문내용
한다면, 도덕상 자율적이 되어야만 하며 그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통제 속으로 받아들여야만>(1:71)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모든 인간의 영혼이 선과 악에 대한 즉각적인 통찰 또는 분별에 필수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1:71) 그리고 <교육이란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편견에 의해 일그러진 안개 장막으로부터, 그리고 실제로는 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입수한, 단지 의견에 불과한 지식의 독단으로부터 영혼의 통찰력을 정화하는 것이다.>(1:72) <따라서 그에게는 더욱더 깊어가는 탐구(inquiry)와, 올림픽 운동 선수가 신체 단련을 위해 하는 정도로 철저한 마음의 훈련(askesis)의 필요가 요청되는 것이다.>(2:55) 만약 이 조건---\'그러나 먼저 그대의 눈이 진정으로 선한 것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라\'(1:74)---이 만족되어 진리를 파악하고 이것에 준해 행동한다면, 당신은 자기 고유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복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올바르다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하는 일이 결코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도 발견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필요한 것은 더 적은 교육이 아니라 더 많은 교육이며, 지적인 것으로부터의 퇴각이 아니라 그것의 더 철저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열렬한 사용이다>(2:52) 라고 결론 짓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의 가르침의 기록에서는 인생의 보편적인 목적 내지 목표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보다 적극적인 플라톤으로 하여금 스승의 가르침을 재생할 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느끼게끔 한 이유>(3:91)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의 본질은 대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3:91-2)이었다.
그러한 그의 방법론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반대 논증(elenchos)은 넘어설 수 있는 모순과 넘어서지 못하는 모순의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 넘어서지 못하는 것에서는 형식 논리학의 分別知가, 넘어서는 것에서는 변증법적 知가 동시에 공존하는 체계인 것이다.>(5:45) <\"음미(exetasis)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적 충고는 그의 전 철학적 방법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5:46)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무지하며 인간의 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음미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귀납법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적 유비적 평행적 귀납법(synagoge)은 개별에서 보편에로 이행함에 있어서 필연적 논증을 결하는 비체계적인 인식의 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소크라테스적 귀납법의 비체계성은 대전제와 소전제 사이의 매개적 논증이 애매하다는 데 기인한다.>(5:48-9) 쉽게 말해 종합 판단의 경우에는 개별자들의 속성들의 완전한 매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귀납법은 개별 사실들의 매거에서 출발하여 개별 사실들과 보편 개념들 사이의 불일치로 끝난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적 사실들이 소크라테스적 귀납법에 재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개념의 정의에 완전한 적극적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5:49)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한 사물의 여러 속성들을 그들의 본질을 통하여 기술하는 것이라고 특징지운다.>(5:51) <소크라테스적 정의의 형식은 X가 무엇이냐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X와 무엇과의 동일시는 두 개념 사이의 단순한 동의어의 추구가 아니라 두 개념 사이의 환원적 동치를 의미한다. 이 동치의 의미는 개별 속성들의 완전한 매거를 요구하여 맞바꿀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ibid.)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소크라테스의 반대 논증에 부딪친다.>(ibid.)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결국 무지의 자의식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경험적 소여의 속성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성 때문에 유개념을 형성할 정도로 통일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경험적 소여의 속성들과 유개념 사이의 관계의 분석에서 오는 괴리의 파라독스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변증적 음미적 반대논증은 덕과 진리의 발견을 위한 방법론이다. 정의를 위한 개념의 이행에 있어서 귀납의 가능성은 결국 반대 논증에 의하여 파괴되지만 한편 그 파괴 자체가 가능한 것은 일반 개념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가능하다 하겠다.>(5:54)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은 귀납적 추리가 왜 전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말해 줄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것에서 경험적인 것과 차원이 다른 보편적이거나 혹은 존재에로의 이행이나 초월이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5:56) 늘 철학의 좌우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소피스트적 회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사람들 앞에 내놓은 것은 \"아직 얻지 못한 지식의 이상\"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그 목표에의 길을 이해하면, 그는 그것을 기꺼이 그들과 함께 탐구하려고 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철학이 이 \"공동 탐구\"로 요약되었다.>(3:92-3) <참된 소크라테스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자세, 즉 쉽게 교만으로 오해된 지적인 겸손을 상징한다. 어떤 적극적인 학설보다도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공헌이다.>(3:93)
Ⅵ. 결론
인간을 만드는 조각가이자 혼의 산파역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던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성찰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명에 대해서는 다시없이 심각하게 생각하였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생각하였다. 그는 역사상 어떤 최후적 결론을 제시하여준 사람이 아니라 방법과 목적을 제시하여 준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당히 죽음을 택했고 영혼의 탐구에 평생을 바쳤으므로 잔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의 가르침의 기록에서는 인생의 보편적인 목적 내지 목표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보다 적극적인 플라톤으로 하여금 스승의 가르침을 재생할 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느끼게끔 한 이유>(3:91)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의 본질은 대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3:91-2)이었다.
그러한 그의 방법론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반대 논증(elenchos)은 넘어설 수 있는 모순과 넘어서지 못하는 모순의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 넘어서지 못하는 것에서는 형식 논리학의 分別知가, 넘어서는 것에서는 변증법적 知가 동시에 공존하는 체계인 것이다.>(5:45) <\"음미(exetasis)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적 충고는 그의 전 철학적 방법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5:46)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무지하며 인간의 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음미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귀납법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적 유비적 평행적 귀납법(synagoge)은 개별에서 보편에로 이행함에 있어서 필연적 논증을 결하는 비체계적인 인식의 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소크라테스적 귀납법의 비체계성은 대전제와 소전제 사이의 매개적 논증이 애매하다는 데 기인한다.>(5:48-9) 쉽게 말해 종합 판단의 경우에는 개별자들의 속성들의 완전한 매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귀납법은 개별 사실들의 매거에서 출발하여 개별 사실들과 보편 개념들 사이의 불일치로 끝난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적 사실들이 소크라테스적 귀납법에 재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개념의 정의에 완전한 적극적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5:49)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한 사물의 여러 속성들을 그들의 본질을 통하여 기술하는 것이라고 특징지운다.>(5:51) <소크라테스적 정의의 형식은 X가 무엇이냐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X와 무엇과의 동일시는 두 개념 사이의 단순한 동의어의 추구가 아니라 두 개념 사이의 환원적 동치를 의미한다. 이 동치의 의미는 개별 속성들의 완전한 매거를 요구하여 맞바꿀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ibid.)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소크라테스의 반대 논증에 부딪친다.>(ibid.)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결국 무지의 자의식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경험적 소여의 속성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성 때문에 유개념을 형성할 정도로 통일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경험적 소여의 속성들과 유개념 사이의 관계의 분석에서 오는 괴리의 파라독스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변증적 음미적 반대논증은 덕과 진리의 발견을 위한 방법론이다. 정의를 위한 개념의 이행에 있어서 귀납의 가능성은 결국 반대 논증에 의하여 파괴되지만 한편 그 파괴 자체가 가능한 것은 일반 개념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가능하다 하겠다.>(5:54)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은 귀납적 추리가 왜 전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말해 줄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것에서 경험적인 것과 차원이 다른 보편적이거나 혹은 존재에로의 이행이나 초월이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5:56) 늘 철학의 좌우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소피스트적 회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사람들 앞에 내놓은 것은 \"아직 얻지 못한 지식의 이상\"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그 목표에의 길을 이해하면, 그는 그것을 기꺼이 그들과 함께 탐구하려고 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철학이 이 \"공동 탐구\"로 요약되었다.>(3:92-3) <참된 소크라테스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자세, 즉 쉽게 교만으로 오해된 지적인 겸손을 상징한다. 어떤 적극적인 학설보다도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공헌이다.>(3:93)
Ⅵ. 결론
인간을 만드는 조각가이자 혼의 산파역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던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성찰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명에 대해서는 다시없이 심각하게 생각하였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생각하였다. 그는 역사상 어떤 최후적 결론을 제시하여준 사람이 아니라 방법과 목적을 제시하여 준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당히 죽음을 택했고 영혼의 탐구에 평생을 바쳤으므로 잔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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