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 조선경제의 변화와 조선인 자본가의 중국침략 실상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조선인 자본가의 중국침략 배경
1. 조선경제의 역할 변화
2. 경제적 침략 논리의 확산

Ⅲ. 조선인 자본가의 중국침략 실상
1. 중국내 조선인 동향
2. 중국내 조선인 자본가의 동향

Ⅳ. 결 론

본문내용

금을 동원할 수 있는 재력가로 변해있었다. 특히 흥아원과 결탁하여 대동아 건설공작에 적극 가담하였고, 당지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실력가가 되어 있었다. 1943년 당시 그에 대한 「삼천리」의 소개문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실업계와도 일방 연결되면서도 동시에 日中合作이라는 커다란 정치적 무대에서 제공작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이태현씨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1929년 상해에 온 이후 대리양향 등 대회사의 중역으로 있으면서 수 십 만원을 동원할 수가 있었고 그 보다도 대동아건설공작에서 열혈남아인 그는 현재 ○○○과 興亞院의 지시하에서 공작에 분주하다"
) 「上海に於ける九千同胞の活躍を見る」, 『三千里』, 1943년 3월호, p.100.
유수영(柳本壽泳)도 미쓰비시(三菱)재벌로부터 금융자본을 융통하여 복기양행 남경지점장으로서 미곡이나 식료업 등에 관여하는 등 해당지역으로 일본재벌자본이 침투하는데 첨병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金仁湖는 불과 5천원의 자본으로 출발하여 일본재벌자본과 연계하여 전당포와 인쇄업을 운영하여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고, 산전계남의 피복공장도 군수지정공장이 되어 노동자 100명을 보유했고 미싱 수만도 500여 대에 달하는 등 침략전쟁과 연관된 산업 분야에서 막대한 자본축적을 하였다. 김형식은 1935년 삼덕양행을 설립하여 제약업을 운영하였는데, 1939년에는 자본금이 8만원에 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3년에는 불자약장을 가지고 전 중국에 약 500여 개의 지점을 가지는 대규모 제약회사를 발돋움한 것이 나타난다. 또한 1939년 자본금 40만원으로 철강을 주로 취급하던 봉재룡의 삼하흥업주식회사는 1943년에는 그의 친족으로 보이는 봉명석이 운영하고 있다. 그의 철공업공장은 이미 자본금이 100만원을 넘고 10개의 지점을 둔 큰 회사로 성장했으며, 그 외에도 알루미늄이나, 직물매매방면에 약 자본금 70만원을 투자하고 있다. 즉 약 4년만에 40만원이던 자본금이 170만원으로 4배 이상 증대된 것이다.
중국에 진출한 조선인 자본가들은 개별적이 아닌 조직적인 일제와의 제휴관계를 획책하면서 상해계림회 등 활동단체를 구성했다. 상해 계림회의 임원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계림회의 고문은 상해거류민단장, 대사관 경무부 제2과장, 상해총영사관 행정부장, 조선총독부 파견 사무관, 상해총영사관 경찰서장, 평의원으로는 金澤秀雄, 靖原甲寧, 孫田昌植, 그리고 이사장에는 江鴻命石(본명은 봉명석으로 삼하흥업 사장) 부이사장은 金海河鍾이었다.
) 그리고 이사로는 金海河鍾, 平田在福, 村井惠, 江鴻命石, 玄谷正柱, 高島輝三, 南宮赫, 松村元雄, 方由老元, 入部俊夫, 坪井盤松, 林承業(경화산업대표), 韓田奎光, 金株龍河, 崔金元慶 등 15명이었다. 총무부장은 松村元雄 조성부장은 玄谷正柱, 문화부장은 平田在福, 厚生部長 金城龍河였다. 서기장은 岩本秀夫고, 총무부위원으로 石川淸吉, 豊由靖三, 文氷鍾鍋, 山平景生, 片山在濬, 大山啓治, 靑木秀夫 등이다. 그리고 조성부 위원은 南一誠, 西原泰熙, 兪奇錫, 洪魚吉, 伊□大輔, 方由宣弘, 月山. 그리고 문화부위원으로는 金田明水, 宇島崇夫, 朴巨影(대동아사 화중특파원), 柳用有吉, 南宮堯, 和田宗, 金谷炳道, 후생부위원은 柳義卓, 吉田光莊, 廣木□, 大丘正雄, 長谷用美宰, 木村建宰, 桂春舞 등이었다(上海鷄林會陣容, 「唯一の半島人團體」, 『대동아』 제15권 제3호, 1943년 3월 1일. p.99).
그리고 문화부장을 맡은 平田在福의 경우 당시 上海興亞院 文化局 요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상해 조선인과 일제의 침략전쟁과 깊은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선인 조직은 상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총독부가 제국의회에 설명한 자료에 의하면 화북 지역만도 "1941년 봄부터 각지에 설치된 協勵會는 1944년까지 43개에 이르고 강력한 황민화 운동을 전개하는 중인데 대동아전쟁 발발하자 각지 재류 일본인 더불어 필승기원, 각종시국관계대회의 개최, 국채의 구입, 금속회수, 비행기 병기의 헌납국방헌금 등 각종 애국운동에 참가하여 열렬한 적성을 피력하고 있다"고 했다.
) 『第86回 朝鮮總督府 帝國議會 說明資料(10)』(1944. 12)(官房, 學務, 法務, 警務, 不二出版. 1994) p.8.
몽강 지역에도 '협려회'가 구축되어 마찬가지 활동을 벌였다.
Ⅳ. 결 론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기존의 엔블록 경제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다. 월등한 생산력을 보유한 영미제국과 겨뤄야하는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식민지 및 점령지에 대해 자발적인 협력과 물자동원력의 확대가 절실했고 그 일환으로 엔블록을 일-만-중국 지역을 넘어 동남아까지 확장하는 한편 조선공업을 '북방 엔블록의 보급창 혹은 물동기지'로 재편하고자 하면서 조선인 자본의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충동질하였다. 이에 자본축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이에 고무된 조선인 자본가들은 적극적으로 만주 및 중국으로 진출했다. 예를 들어 경성방직의 남만면업, 삼성의 선만무역, 기타 중국 내 상해. 소주. 남경 지역의 100여 업체 등은 기업주의 출신지나 창업일시 혹은 사업내용을 볼 때 '자연이주'라기보다는 침략전쟁에 편승한 것이었고, 일단 허가 받은 조선인 기업은 일제가 추진한 엔블록 자급정책의 틈을 비집고 막대한 자본을 증식할 수 있었다. 이들은 철강·제약·무역·정밀기계수리·만년필·잡화·식품업 등 제조업에서 진출했지만 그 보다는 위안소, 댄스홀, 카페 등 비생산적 소비산업에 적극 진출하여 높은 수익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자유상업의 철저한 불허방침에서 나타나듯이 기업활동은 철저한 일제의 통제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이들 조선인 자본은 각종 조직(계림회, 협려회)을 설립하여 흥아원이나 특무공작대 혹은 영사관, 재벌지점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단순한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이른바 대동아공영권건설공작에 적극 참가하여 여러모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른바 1940년대 조선인 자본가 계급은 침략전쟁에 적극 편승하여 중국으로 대거 진출하였고, 위안소 등 향락 소비산업에도 참가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였다. 즉 당시 조선인 자본에게는 침략전쟁이 자본의 배양처였고, 그들은 침략전쟁의 전위대였다.
  • 가격2,7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7.01.20
  • 저작시기2007.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975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