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장 「非자민」 연립정권 시대
1. 호소카와 정권의 탄생 : 「非자민」정권의 탄생
2. 하타 내각
제 2장 전환점으로서의 전후50년
1. 무라야마 사회당 정권(自-社-さ)
2. 자민당 연립정권 : 하시모토 수상
제 3장 좌절하는 개혁
1. 하시모토 수상의 6대 개혁
2. 오부치 정권
3. 모리수상과 ‘일본은 신의 국가’ 발언
4. 고이즈미 수상의 인기와 구조개혁
1. 호소카와 정권의 탄생 : 「非자민」정권의 탄생
2. 하타 내각
제 2장 전환점으로서의 전후50년
1. 무라야마 사회당 정권(自-社-さ)
2. 자민당 연립정권 : 하시모토 수상
제 3장 좌절하는 개혁
1. 하시모토 수상의 6대 개혁
2. 오부치 정권
3. 모리수상과 ‘일본은 신의 국가’ 발언
4. 고이즈미 수상의 인기와 구조개혁
본문내용
적이라는 강한 비판이 받았다. 이처럼 모리 정권은 발족당초로부터 강한 역풍을 받았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국가’라는 등 모리는 많은 실언으로 수상으로서의 부적격성을 노출했다. 모리수상은 2000년 6월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신제도 하에서 2번째 총선거가 행해졌다. 모리 수상에 대한 국민들의 낮은 지지로 인해 자민당은 선거 전의 의석을 대폭 잃어 단독과반수를 획득하는 것에 실패했다. 하지만 공명당 등과의 연립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다. 총 선거후 자민당 내에서는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집행부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나오게 된다. 모리정권은 「가토(加藤)의 난」을 격어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곤란해 졌다. 2001년 2월에는 내각지지율이 9%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동년 여름 참의원선거를 앞두고 모리 정권이 퇴진하게 되었다.
4. 고이즈미 수상의 인기와 구조개혁
모리 수상의 퇴진 표명이 받아들여져 2001년 4월에 자민당총재선거가 행해졌다. 최대파벌인 하시모토파로부터는 하시모토 류타로 전 수상이, 모리파로부터는 모리의 후계자로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입후보했다. 이 총재선거는 일반당원에 의한 예비선거와 당소속 국회의원에 의한 투표의 2단계로 진행되었다. 예비선거에서는 각 도도부현(都道府縣)에 할당된 표를 1위의 후보자가 전부 획득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다나카 마키코, 이시하라 등 모리 정권시대에 집행부의 낡은 체질을 비판해온 젊은 의원들은 파벌에서 벗어나 있던 고이즈미를 지지했다. 또한 고이즈미 자신도 자민당의 개혁을 내세우면서 커다란 붐을 일으켰다. 총재선거의 유권자는 어디까지나 자민당원이었지만 고이즈미는 각 지역을 다니면서 유세활동을 벌여 일반국민들에게 직접 자신의 개혁론을 밝힘으로서, 모리 정권에 실망해 있던 국민의 기대를 모았다. 자민당원의 대다수는 업계단체나 정치가 후원회 등의 멤버로서 하시모토파를 중심으로 한 이익배분정치의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론의 커다란 지지를 받고 있는 고이즈미의 인기를 조직을 넘어설 수 있었다. 예비선거에서는 고이즈미가 거의 모든 도도부현에서 승리를 해 국민적 인기를 반영했다. 국회의원 수만 본다면 하시모토가 유리했지만, 고이즈미 지지라는 대세에 압도되어 국회의원에 의한 본선거에서도 고이즈미는 총재에 선출되었다. 고이즈미수상은 다나카 가쿠에이 이후 하시모토파와 연관이 있었던 이권정치와 관료라는 두 가지 표적에 대한 구조개혁을 내세웠다. 그것은 종래의 일본 정치의 상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같은 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수상취임직후 각료인사에서도 파벌의 균형이나 당선회수에 의한 처우라는 종래의 기준을 무시하고 젊은 의원들이나 민간인의 등용을 추진했다. 그리고 우정사업민영화, 도로특정재원의 개혁, 수상공선제의 검토 등의 새로운 과제를 계속해서 내놓아 탑다운(top-down)형태의 정책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구조개혁의 주창함으로서 이권정치에 식상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발족 당초 고이즈미 수상의 지지율은 80%를 넘는 기록적인 것이었다.
4. 고이즈미 수상의 인기와 구조개혁
모리 수상의 퇴진 표명이 받아들여져 2001년 4월에 자민당총재선거가 행해졌다. 최대파벌인 하시모토파로부터는 하시모토 류타로 전 수상이, 모리파로부터는 모리의 후계자로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입후보했다. 이 총재선거는 일반당원에 의한 예비선거와 당소속 국회의원에 의한 투표의 2단계로 진행되었다. 예비선거에서는 각 도도부현(都道府縣)에 할당된 표를 1위의 후보자가 전부 획득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다나카 마키코, 이시하라 등 모리 정권시대에 집행부의 낡은 체질을 비판해온 젊은 의원들은 파벌에서 벗어나 있던 고이즈미를 지지했다. 또한 고이즈미 자신도 자민당의 개혁을 내세우면서 커다란 붐을 일으켰다. 총재선거의 유권자는 어디까지나 자민당원이었지만 고이즈미는 각 지역을 다니면서 유세활동을 벌여 일반국민들에게 직접 자신의 개혁론을 밝힘으로서, 모리 정권에 실망해 있던 국민의 기대를 모았다. 자민당원의 대다수는 업계단체나 정치가 후원회 등의 멤버로서 하시모토파를 중심으로 한 이익배분정치의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론의 커다란 지지를 받고 있는 고이즈미의 인기를 조직을 넘어설 수 있었다. 예비선거에서는 고이즈미가 거의 모든 도도부현에서 승리를 해 국민적 인기를 반영했다. 국회의원 수만 본다면 하시모토가 유리했지만, 고이즈미 지지라는 대세에 압도되어 국회의원에 의한 본선거에서도 고이즈미는 총재에 선출되었다. 고이즈미수상은 다나카 가쿠에이 이후 하시모토파와 연관이 있었던 이권정치와 관료라는 두 가지 표적에 대한 구조개혁을 내세웠다. 그것은 종래의 일본 정치의 상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 같은 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수상취임직후 각료인사에서도 파벌의 균형이나 당선회수에 의한 처우라는 종래의 기준을 무시하고 젊은 의원들이나 민간인의 등용을 추진했다. 그리고 우정사업민영화, 도로특정재원의 개혁, 수상공선제의 검토 등의 새로운 과제를 계속해서 내놓아 탑다운(top-down)형태의 정책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구조개혁의 주창함으로서 이권정치에 식상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발족 당초 고이즈미 수상의 지지율은 80%를 넘는 기록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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