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선교][감리교][장로교][구세군]한국 선교 심층 분석(바울 선교, 매클레이의 한국 선교,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감리교의 전래, 장로교의 전래, 몰렌돌프의 한국 선교, 구세군의 선교, 선교, 구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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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선교][선교][감리교][장로교][구세군]한국 선교 심층 분석(바울 선교, 매클레이의 한국 선교,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감리교의 전래, 장로교의 전래, 몰렌돌프의 한국 선교, 구세군의 선교, 선교, 구세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바울 선교

Ⅱ. 매클레이의 한국 선교

Ⅲ.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Ⅳ. 감리교의 전래

Ⅴ. 장로교의 전래

Ⅵ. 몰렌돌프의 한국 선교

Ⅶ. 구세군의 선교

본문내용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로쓰목사의 편지를 받은 몰렌돌프는 즉시 제물포세관에 문의하였다. 그결과 몇일전에 그러한 책이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금서에 속하는 것이므로 압류하여 창고에 엄봉해 두었고, 그 물건을 받을 사람의 이름이 서상륜이고 주소는 몰렌돌프로 되어있어 이상하게생각하고 있었다는 대답이었다. 때마침 몰렌돌프의 아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어떻게해서든지 그 책을 찾아내야 한다고 역설하여 동분서주하여 무사히 인수하여 모둔 서상륜과 이성하에게 전달하였다. 서상륜은 그 책을 받아가지고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하는데 아주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몰렌돌프는 독일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근엄한 성격에 야욕이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영사의 일을 보았으며 5년이나 세관에 근무한 경험이있어 한문이나 중국어에 숙달하여 동양 사정에 정통하였다. 그는 1882년 11월 5일 한국에 상륙하였으며, 몰렌돌프는 [목린덕]이란 한국식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한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며 상투를 틀고 통영삿갓을 쓰고 그의 부인은 쪽도리를 쓰고 역시 한복을 착용하는 등으로 생활양식을 대부분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리하여 그는 한국인에게 호감을 샀으며 명성이 높아지고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외아문(오늘의 외교부)에 있어서의 교섭은 몰렌돌프가 담당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가 재사라고 간파하여 그를 주천하여 1882년 중국에 외교사절로 파견케 하였으며 또한 1883년에는 미국에 전권 대사로 파송토록하여 한국의 개국활동과 세계 각국과의 친선 교류를 위하여 크게 노력하였다. 몰렌돌프는 또한 알렌(Horace N.Allen) 의사를 한국주제 선교사로 부임케하는데 전적으로 역할하여 한국 선교사업 개시의 스타트를 획하는데 공을 세웠다.즉 중국 상하이에 있는 몰렌돌프의 친우 헨델슨(Hen-derson)선교사는 몰렌돌프를 통하여 한국의 사정을 알게되었고 헨델슨 박사는 알렌 의사에게 한국에서의 보람있는 선교를 권고한 것이었다. 몰렌돌프는 아직까지 기독교를 금단하고 있는 국왕과 조정을 향하여 알렌은 다만 의료를 목적하여 내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여 무난히 국왕의 재가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몰렌돌프는 다음의 네가지 점에서 한국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그는 로쓰목사로부터 보내온 6천권 성서를 한국인 전도자에게 전달하여 복음 전파사업에 도움되게 후원하였고, 다음은 민영익을 미국에 보냄으로 한국 선교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영향을 주었고, 셋째는 중국주재 선교사 알렌을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주선한 일이었다. 그리고 넷째로는 한국정부로하여금 알렌박사의 탁월한 의학 기술을 인식케하여 병원을 개설하게 함으로 기독교 선교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여건을 만들어준 사실이라 하겠다.
Ⅶ. 구세군의 선교
구세군 (The Salvation Army) 의 한국 개전은 1908년부터이다. 구세군은 영국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우드(William Booth)와 부인 캐더린(Catherine)이 창시한 전도, 자선, 사회 사업을 목표한 종교 단체이다. 1865년에 활동 본거지를 런던(London) 에 두고 옥외 광장이나 천막 집회 등을 이용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1878년부터 구세군(The Salvation Army)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세군의 조직과 기율은 군대식으로 편성되었고 부우드 자신이 대장에 취임하였다. 한국 선교를 위하여 파견된 구세군의 선봉 장교는 혹가아드 (Robert Hoggard) 정령과 그의 일행이었다. (Korea Mission Field, Vol,4 No.10. 1908.P754) 윌리엄 부우드가 세계 순회도중에 1907년 일본에 들렸을 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레일튼(C.S.Railton)과 로울리(CJ.Lawley)의 두 사관을 파송하여 한국의 현지를 답사케 하였다. 그들은 1908년 10월 1일 내한하여 서울 서대문구에, 현고려병원 뒤에 본부를 두고 선교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가로 상에서 전도하고 옥내 집회는 혹가아드 정령의 집에서 모였으나 참가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11 월에는 새문안에 서대문 영을 개척하게 되었고 12월에는 서울 2영을 개척설립하였다. 1885년에 장로교, 감리교가 들어와 선교 구역을 책정하는 등으로 기독교 선교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또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여파로 선교 사업은 어렵지않게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식 조직의 구세군의 복음 선교는 쉽게 적응되지 아니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월간지 구세공부(The War Cry)가 발간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구세군의 큰 발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년 2월 15일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가 서울 서대문구에서 개교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성경대학이라 이름하였고 본윅 참령이 교장으로 시무하였다. 한국 구세군은 1916년 이래 대대적인 금주 운동의 전개, 육아원의 개설 18년에는 걸인 아동을 위한 구제사업과 빈민을 위한 연료와 식표품의 공급 그리고 22년에는 간이 진료소를 개설하기도 했고 24년에는 빈민 숙박시설등을 마련하면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자선남비] 사업으로 이웃돕기 운동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행하고 있다. 구세군은 6.25 전란 기간에도 쉼없이 자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군산, 대전, 대구, 부산,서울 등지에 고아 육아원을 시설하였고 특히 서울에는 여자 후생학원, 군산에 모자원, 영동에 구세병원을 설립한 것이 뛰어나 있다. 로드 (H.A.Lord) 사령관을 비롯한 김삼석 고등정위, 김진한 참위의 세사관이 남침한 공산권에 의하여 남북되었음은 비극이었다. 로드 사령관은 3년의 포로생활을 거친후 1953년 4월 기적적으로 본국에 귀환하였으나 두 사람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영수 참령은 진주 영문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어 지리산 밑으로 끌려가 총살로 순교하였다. 한손에 군가 다른 한손에는 성경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총살하는 자를 위하여기도하는 [순교자의 피]라는 영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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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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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1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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