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문학과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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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2.1 향가의 개념
2.2 향가의 유형과 구조
2.3 향가의 역사적 전개와 작품 세계
2.3.1 민요 계열
2.3.2 사뇌가 계열

3. 향가의 수용과 전승

4. 맺음말

본문내용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관계에 맞서기 위해 일본은 발해와 손을 잡아야 했고 선진문명을 발해를 통해 받아들이려 했다. 일본에 간 발해문인들은 일본 한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가서 시를 남긴 발해 사신의 선구자는 양태사(楊泰師)로 송별연에서 일본 문인들의 시에 화창했다는 시 두 편이 일본의 한시집 <경국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야청도의성>(夜聽衣聲)은 일본에 없는 풍속인 다듬이 소리를 듣고 상념에 젖어 쓴 것이다. 또한 왕효렴(王孝廉)은 당시 일본 한문학의 발전을 진작시킨 차아임금의 때에 사신으로 가서 일본에서 크게 환영받아, 남아 있는 작품이 다섯 수나 된다. 화려하고 질탕한 분위기에 취해서 놀았다고 하는 시도 있고 일본 문인과 주고받은 시도 있으며 멀리 두고 온 고국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도 있다. 배구(裵)라는 사람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시를 지어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배구의 작품은 한 편도 전하지 않는다. 승려들도 사신의 일행이 되어 일본을 왕래하고 시를 남긴다. 인정(仁貞)의 시는 한 편 전하는데 일본 궁중에서 잔치가 벌어질 때 상빈 대접을 받고 즐거워한 사연들 담고 있는 것이다. 정소(貞素)란 승려는 당나라에 머물면서 일본 승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한 편을 남겼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
『삼국사기』권 32 <잡지> 제1에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 다섯 수가 실려 있다. 최치원은 <향악잡영오수>에서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猊)의 시 다섯 수를 지었다. 이 다섯 가지 놀이는 신라 공연예술의 실상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금환(金丸)
몸 돌리고 팔 흔들어 금환을 희롱할 때
달이 구르고 별이 뜨듯 한눈에 가득
의료(宜僚)가 있다 한들 이 보다 나을건가
동해바다 파도소리마저 잠잠해진다
廻身掉臂弄金丸 月轉星浮滿眼看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월전(月顚)
솟은 어깨 움츠린 목 머리카락 치떠 세워
여러 선비가 팔을 뽐내며 술잔을 다투네
노랫소리 들리자 사람들의 한바탕 웃음소리
초저녁에 단 깃발이 새벽머리 재촉한다
肩高項縮髮崔嵬 攘臂儒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대면(大面)
황금빛 탈 쓴 사람 그 누구인가
방울 달린 채찍 들고 귀신을 쫓네
빠른 걸음 느린 가락에 우아한 춤을 추니
완연히 붉은 봉황 태평 시절 반기는 듯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趨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속독(束毒)
쑥대머리 남빛 얼굴 이상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뜰에 와서 난새같이 춤을 추네
북소리 둥둥 울리고 바람은 살살 부는데
이리뛰고 저리뛰며 끝없이 춤추네
蓬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산예(猊)
먼 사막건너 만리길을 오느라고
털옷은 해어지고 먼지까지 덮었구나
머리 흔들고 꼬리 침에 어진 덕이 나타나고
걸출한 그 기상이 온갖 짐승과 같을 거나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著塵埃
搖頭掉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4, 24 진흥왕 37년조).
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그 敎를 창설한 내력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三敎를 포함하여 群生을 接化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司寇의뜻이요, 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敎를 행함은 周桂史의 宗旨요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竺乾太子의 敎化이다. 성낙희,『崔致遠의 詩精神 硏究』, 관동출판사, 1990, 71면.
Ⅵ. 결언
이상으로 최치원의 문학세계를 그의 내면세계의 표출양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은 시의 경우, 대체로 자연경물을 읊은 것, 교유관계를 읊은 것, 풍속을 읊은 것 다양한 시적 경향을 보여 주고 있으나, 특히 현실에서 오는 자신의 시름과 고뇌, 비판적인 내면의식 등을 표출한 작품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최치원은 남다른 포부와 각고의 노력으로 당대의 우뚝한 문사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는 하였으나, 그 자신 주변국의 한 시객으로서의 지역적, 정신적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강한 서정성을 가지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남긴 산문 문학은 대부분 남의 입장에서 쓴 대필(代筆)이다. 또한 그는 4 6음을 번갈아 써서 정교한 대구를 성립시키며 구절마다 화려한 수사와 다양한 전고(典故)를 활용하는 변려체를 주로 사용했다. 최치원이 쓴 대표적 산문 문학인「격황소서」는 격문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으며 변려문 문체의 특성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가 신라로 돌아와 지은『사산비명』은 비명(碑銘)의 한 모범을 정립하였고 불교적 내용을 찬양함에 있어서 유려한 변려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한편 최치원의 경우 그의 작품세계 못지않게 중요한 사항은 한국 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문학사적 위상이다. 그는 사륙문(四六文)의 전범을 이룩하고 근체시의 전통을 이 땅에 정착시켰으며, 당나라 유학과 부단한 저술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한국 한문학을 산출해 놓은 점에서 일찍부터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우리 문학사의 위상에서도 그는 두드러진 존재임에 틀림없다. 김진영 외,『고운 최치원 시집』, 민속원, 1997, 146~147쪽
Ⅶ. 참고문헌
김인종 외,『고운 최치원』, 민음사, 1989.
김진영 안영훈,『고운 최치원 시집』, 민속원, 1997.
성낙희,『최치원의 시정신 연구』, 관동출판사, 1986.
이강옥,『민족문학사 강좌(상)』,「남북국시대 최치원의 문학과 역사적 성격」, 1995.
조동일,『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조인성, 최치원의 역사서술,『역사학보』제9495합본, 1982.
허경진,『고운 최치원 시선』, 평민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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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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