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서태지의 사상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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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 론 Ⅱ.

본 론 Ⅱ.
1. 이상문학의 배경
◦이상의 삶
◦이상의 여인상
◦이상(李箱)이라는 필명
2. 시의 비교 및 분석
◦꽃나무
◦거울
3. 이상과 서태지의 비교

결 론Ⅲ.

본문내용

입혀졌던 정신적 외상이 그 시초였으며 점차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생활의 기복과 불안한 주변상황, 기대와 눈총으로 엇갈리던 백부댁의 생활 등이 그를 비정상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에다 건강의 악화는 그를 완전 파멸의 늪으로 몰아 부쳤다. 이렇게 해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그의 잠재의식들은 서서히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의 많은 시작품 속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상의 시를 통해 살펴본 부정의 양상들은 먼저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는 근대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실망을 안고 출발한 그는 자구책을 찾아보지만 그 자체가 내적 부정이라는 불안한 예감 속에서 다리 고립되고 만다. 마치 내 자신을 일치점 없는 분열과 대립의 상태로 몰고 간다. 분열된 두 자아는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관념적 유희에 머물고 만다. 의도적 소외와 단절에서 온 이것은 아무런 의미없는 자기 위장술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상은 단절의 벽을 쌓게 된다. 그들은 사회적.역사적 끝으로도 교통되지 못하고 진정한 소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그는 전도된 가치로 그 관계를 유지하며 철저한 위장수법을 대타관계를 이루어 온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밀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육친의 관계에서도 불안과 절망을 느끼며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립되고 분열된 이미지들은 이상의 부정의식의 중요한 핵심이 되며 그로 인해 끊임없는 갈등을 계속하는 것이다.
꽃나무와 거울도 마찬가지다. 이 두편의 시는 모두 단절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꽃나무는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단절감을, 거울은 현실속의 자기 자신과 내면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단절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시속에 투영된 부정의식의 전모가 밝혀졌으며 이상의 시에 대한 재평가도 조금이나마 이루어 졌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부정의식이야말로 이상의 시 전체를 이루는 중요한 흐름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문학의 성과에 대해서 성급히 어떤 상찬이나 비하를 앞세우기보다도 우선 그가 겪은 고통과 부정의 요인들을 좀더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연보>
1910
(1세)
9월 23일(음력 8월 2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해경(海卿). 본관은 강릉.
1912
(3세)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連弼) 집에서 장손으로 성장.
1917
(8세)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에 입학. 이때부터 그림에 재질을 보임.
1921
(12세)
신명학교 4년 졸업.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그해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경영의 동광(東光)학교에 입학.
1924
(15세)
동광학교가 보성고보(普成高普)로 병합. 이 해에 교내 미술전람회에 유화 <풍경> 입상.
1926
(17세)
보성고보 5학년 졸업. 그해 동숭동에 있는 경성(京城)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입학.미술에 집착을 가지고 보낸 고공 1여년동안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 삽화와 시를 발표.
1929
(20세)
경성고공 졸업.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취직. 11월 관방(官房) 회계와 영선계로 옮긴 후 <조선과 건축>회지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으로 각각 당선(12월).
1931
(22세)
7월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8월 일문시 『오감도』, 10월 『삼차각 설계도』를 각각 <조선과 건축>에 발표. 이 무렵 곱추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됨. 서양화 『자화상』을 <선전(鮮展)>에 출품해 입선. 이 해에 백부 사망.
1932
(23세)
<조선과 건축>회지 소화 7도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서 제4석에 당선. 비구(比久)란 익명으로 시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 7월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란 필명으로 된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발표.
1933
(24세)
3월 심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사임. 통인동 백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효자동에 집을 얻고, 21년만에 친부모 형제들을 옮겨옴. 백모는 계동으로 이사. 요양차 백천온천에 갔다가 그곳 기생 금홍과 알게됨. 서울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 금홍과 동거생활 시작(7월). 『꽃나무』외 시 2편을 <카톨릭 청년>에 발표(7월).
1934
(25세)
<구인회>에 가입 본격적인 문학활동 시작. <매일신보>에 시 '보통기념'을 발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회로 중단.『소설가 구보(九甫)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림(8월). <중앙>에 시 『소영위제』를 발표
1935
(26세)
<카톨릭 청년>에 시 『정식』(4월), <조선중앙일보>에 시 『지비』를 발표(9월). 다방 '제비'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금홍과 헤어짐. 인사동에 카페 '학'을 인수해 경영하지만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다방 '69'를 설계하나 양도하고, 다방 '맥'을 설계, 중도 해약. 계속된 경영 실패로 그의 가족은 신당동 빈민촌으로 이사. 성천, 인천 등지로 여행. <매일신보>에 『산촌여정』 발표
1936
(27세)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둠. <중앙>에 『지주회시』(7월)를, <조광>에 『날개』(9월)를 발표. <조광>에 『동해』 발표(10월), <중앙>에 『지비 1,2,3』, <가톨릭 청년>에 『역단』, <여성>에 『명경』 등 발표. 전부터 알았던 변동림과 결혼. 새로운 재기를 위하여 일본 동경으로 감(음력 9월3일). 그 곳에서 『공포의 기록』, 『종생기』, 『권태』, 『슬픈 이야기』, 『환시기』 등을 씀.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됨(12월)
1937
(28세)
사상 불온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2월). 병보석으로 출감(3월). 4월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 향년 만 26년7개월. 그 전날(16일) 부모와 조모 사망.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환국하여 미아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유실. 5월에 『종생기』가 <조광>에 발표됨.
1939
『실락원』<조광>, 『실화』<문장> 등 유고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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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3
  • 저작시기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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