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고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고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 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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