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답사][경주 기행문][경주 답사 기행문][답사 기행문][경주]답사 기행문 - 경주(경주의 지리적 입지와 자연환경, 용담정, 보리사, 독락당, 감은사터, 황룡사터, 불국사, 석굴암, 석불사, 분황사, 첨성대,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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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 답사][경주 기행문][경주 답사 기행문][답사 기행문][경주]답사 기행문 - 경주(경주의 지리적 입지와 자연환경, 용담정, 보리사, 독락당, 감은사터, 황룡사터, 불국사, 석굴암, 석불사, 분황사, 첨성대, 경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경주의 지리적 입지와 자연환경

Ⅲ. 용담정

Ⅳ. 삼릉골 석불좌상

Ⅴ. 보리사

Ⅵ. 독락당

Ⅶ. 감은사터

Ⅷ. 황룡사터

Ⅸ. 불국사

Ⅹ. 석굴암(石窟庵) - 석불사(石佛寺)

Ⅺ. 분황사

Ⅻ. 첨성대

ⅩⅢ.나가며

본문내용

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내부는 흙으로 메워져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 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井자 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을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 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맨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의 꼭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첨성대의 높이는 9.108m, 밑지름이 4.93m, 윗지름 2.85m이며 제 27대 선덕여왕 재위중(632 - 647년)에 축조되었다.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헌데, 동양 최고라는 수식어가 멋있기는 하지만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주장은 그리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첨성대에서 실제로 천문을 관측하였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첨성대의 구조가 천문관측을 행한 곳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결함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1970년부터 일부 학자들이 첨성대가 구조면에서 천문대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즉 첨성대 중간에 있는 창문이 과연 천문을 관측하는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출입구로 적당한가가 주된 의문점이었다. 일찍이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바로 이 창문을 통해서 관측자들이 오르내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였고, 천문대임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안에다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오르내렸으며, 정상 부에는 별을 관측하는 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사람이 이 창문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르내릴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출입구였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사다리를 놓고 매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동 아닌가..오히려 돌계단 등을 미리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이 더욱 편리했을 것이다.
또 지금 2.85미터의 정상부는 혼천의를 놓고 몇 사람이 관측과 기록을 하였다고 보기엔 너무 좁으며, 악천후를 대비한 어떠한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땅에서 겨우 10미터 가령 올라갔다고 해서 별이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 위에서 별을 보겠다고 좁은 입구로 들어가서 고생고생 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 아닐까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첨성대는 천문대\'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별을 바라다보는 건축물\'이라는 의미의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첨성대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 즉 천문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해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춘분과 추분점, 하지와 동지점 및 하루의 시각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규표(圭表)라는 주장, 그리고 둘째, 직접적인 천문 관측을 하기보다는 천문에 대한 당시인들의 사고방식을 상징화한 조형물이라는 주장, 또 첨성대의 모습이 불교의 이상형을 그려낸 수미산과 유사하다고 하여 불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제단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첨성대를 두고 천문대다 아니다 주장이 엇갈리고 있지만, 첨성대는 그 오랜 세월동안 홀로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의연하게 우뚝 솟아있다.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 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을 터이다.
ⅩⅢ.나가며
경주도심지역은 신라천년의 중심 지역이었다. 천년고도 혹은 세계 10대 유적지로서의 경주가 그 역사적 가치에 걸 맞는 경관을 갖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고대신라문화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왕경, 고분군, 그리고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이 경관적 품격을 유지하도록 경관이 계획 및 관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제도의 마련과 종합적 계획, 그리고 경제적 지원 등이 필요하지만, 계획적 측면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안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도심지역의 고분군 및 주요 문화재의 경관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1) 문화재와 유적지의 면적을 기준으로 open space를 확보하여 공간감을 조성하거나(이, 2001), 2) 문화재와 유적지 주변에 차폐식재를 조성하거나(이와 민, 1998; 촹재영, 1983). 3) 문화재와 개발지구 사이에 완충지대를 확보(김영대, 1993)하거나, 4) 주변지역의 개발규모를 전 지역의 자연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산정(노와 김, 1995) 하는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재에 대한 적극적 이용과 활성화를 꾀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1) 도심지역에 있는 신라유적지(노동/노서 고분군, 천마총, 첨성대, 반월성, 계림)와 더불어 조선의 유적지인 교동, 읍성지역에 대한 계획이 동시에 마련되어야 하며, 2) 도심 지역 문화재에 대한 적극적 연계를 통해 경주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을 유발하여야 한다(김, 1993). 산재한 유적들 사이로 연결되는 쾌적한 보행가로의 구축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가로가 도심의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연결되고, 더 나아가 도심주변의 자연지역(형산강, 북천, 남천, 황성공원, 남산 등)으로 확장 및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다(이, 2001).
셋째, 이와 함께 시민들과 방문객에 대한 경주지역 인지도 조사를 일정기간별로 실시함으로써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실제적인 인지상태를 파악하고 경주 경관계획의 기본자료로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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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6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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