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책 내용 요약
1. 제1․2차 아편전쟁 기간의 정치상황
2. 양무운동의 전개와 수구와 개혁
3. 변법운동의 전개와 각 정치세력의 각축
4.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개혁․혁명
Ⅲ. 나오며
Ⅱ. 책 내용 요약
1. 제1․2차 아편전쟁 기간의 정치상황
2. 양무운동의 전개와 수구와 개혁
3. 변법운동의 전개와 각 정치세력의 각축
4.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개혁․혁명
Ⅲ. 나오며
본문내용
무술개혁 시기의 외교정책
이홍장은 명치 일본의 흥기를 예상하여 일본을 장차의 보다 큰 위협으로 간주하여 러시아와의 연결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리(伊梨)지방의 분쟁에서 러시아에 지나치게 양보한 숭후(崇厚)외교에 대해 청류파 전원이 굴욕적이라고 들고 일어났을 때, 이홍장은 숭후를 치죄하라는 논의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까 두렵다고 하면서 총리아문 당국자는 그런 부언에 현혹되지 말고 대계를 주지해야 한다고 하여 러시아와의 친선외교를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이홍장은 시종 일본을 심복대환(心腹大患)으로 보고 연아(聯俄)정책을 추구하였다. 영국, 러시아의 압력은 결국 막아낼 수 없으므로 동맹 등을 통해 최소한도로 막아내고 새로 압력을 가해올 가까운 일본의 위협은 가능한 한 막는다는 전략이었다.
중아(中俄)동맹조약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체결되었다. 앞으로 있을 외국의 공격에 중국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고, 청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떼어 준 대만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깊은 영국이나 러시아 가운데 어느 하나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아동맹의 기본발상이다. 영국은 일본과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하는 전략이기 때문에 일본을 가상적으로 볼 경우 러시아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는 광학회(廣學會) 선교사 티모시 리차드, 영 알렌 등은 영국과의 연맹을 넘어 중국을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으로 하는 방안까지 모색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이 일본과의 연맹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영국정부 측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과의 연맹 필요성이 일본처럼 급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처럼 최근에 전쟁을 한 나라가 아니었으며, 영국으로서는 중국의 영토분할을 막아내면 되지 연맹까지 체결하여 깊은 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었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4.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개혁혁명
1) 의화단사건 전후의 수구파와 양무파
무술 정변이후 근대사상 처음으로 청조 핵심권력을 잡은 수구파는 광서제 폐위음모를 진행한다. 수구파의 거두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황위계승자로 세웠다가 광서제를 폐위하고 즉위시키다는 음모였다. 1900년에 실행했으나 상해 신상사민의 연명 반대성명과 해외화교 수십만의 반대성명, 열강의 반대의사 표명에 의해 실패하게 되었다. 수구파에 의한 정권장악과 황제폐위음모의 실패 등은 양무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배외-주전론으로 치닫게 된 주요배경이었다. 이 사태에 의해 열강은 청조에 대한 선전포고가 발표되고 일본을 포함한 8개국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의화단 진압과 청조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여 수도 북경은 서양세력에 의해 점령되었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피하였다. 이때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양무파는 의화단을 폭도로 규정하고 청조가 내린 선전상유도 황권찬탈파가 작성한 위조조서라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혁명파 손문과 합작하여 홍콩총독의 도움을 받아 광동-광서지역을 독립시키는 계획도 추진하였다. 청조는 할 수 없이 양광총독 이홍장을 다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의화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사태수습을 명했다. 의화단이 진압되 1900년 10월에 북경에 도착하여 열강과 교섭하여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였다. 이러인해 수구파는 몰락하게 된다.
2) 청말신정과 새로운 변혁주체의 형성
8개국 연합군의 수도점령과 서태후광서제의 도피, 정권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조약의 체결, 양무파 대신들의 동남호보는 청조의 집권체제가 명백히 해체되어 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새로운 변혁 주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도시신사들은 양무운동기 이래 여해 개항장을 중심으로 출현한 근대적 언론매체를 토
이홍장은 명치 일본의 흥기를 예상하여 일본을 장차의 보다 큰 위협으로 간주하여 러시아와의 연결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리(伊梨)지방의 분쟁에서 러시아에 지나치게 양보한 숭후(崇厚)외교에 대해 청류파 전원이 굴욕적이라고 들고 일어났을 때, 이홍장은 숭후를 치죄하라는 논의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까 두렵다고 하면서 총리아문 당국자는 그런 부언에 현혹되지 말고 대계를 주지해야 한다고 하여 러시아와의 친선외교를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이홍장은 시종 일본을 심복대환(心腹大患)으로 보고 연아(聯俄)정책을 추구하였다. 영국, 러시아의 압력은 결국 막아낼 수 없으므로 동맹 등을 통해 최소한도로 막아내고 새로 압력을 가해올 가까운 일본의 위협은 가능한 한 막는다는 전략이었다.
중아(中俄)동맹조약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체결되었다. 앞으로 있을 외국의 공격에 중국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고, 청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떼어 준 대만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깊은 영국이나 러시아 가운데 어느 하나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아동맹의 기본발상이다. 영국은 일본과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하는 전략이기 때문에 일본을 가상적으로 볼 경우 러시아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는 광학회(廣學會) 선교사 티모시 리차드, 영 알렌 등은 영국과의 연맹을 넘어 중국을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으로 하는 방안까지 모색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이 일본과의 연맹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영국정부 측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과의 연맹 필요성이 일본처럼 급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처럼 최근에 전쟁을 한 나라가 아니었으며, 영국으로서는 중국의 영토분할을 막아내면 되지 연맹까지 체결하여 깊은 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었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4.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개혁혁명
1) 의화단사건 전후의 수구파와 양무파
무술 정변이후 근대사상 처음으로 청조 핵심권력을 잡은 수구파는 광서제 폐위음모를 진행한다. 수구파의 거두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황위계승자로 세웠다가 광서제를 폐위하고 즉위시키다는 음모였다. 1900년에 실행했으나 상해 신상사민의 연명 반대성명과 해외화교 수십만의 반대성명, 열강의 반대의사 표명에 의해 실패하게 되었다. 수구파에 의한 정권장악과 황제폐위음모의 실패 등은 양무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배외-주전론으로 치닫게 된 주요배경이었다. 이 사태에 의해 열강은 청조에 대한 선전포고가 발표되고 일본을 포함한 8개국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의화단 진압과 청조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여 수도 북경은 서양세력에 의해 점령되었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피하였다. 이때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양무파는 의화단을 폭도로 규정하고 청조가 내린 선전상유도 황권찬탈파가 작성한 위조조서라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혁명파 손문과 합작하여 홍콩총독의 도움을 받아 광동-광서지역을 독립시키는 계획도 추진하였다. 청조는 할 수 없이 양광총독 이홍장을 다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의화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사태수습을 명했다. 의화단이 진압되 1900년 10월에 북경에 도착하여 열강과 교섭하여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였다. 이러인해 수구파는 몰락하게 된다.
2) 청말신정과 새로운 변혁주체의 형성
8개국 연합군의 수도점령과 서태후광서제의 도피, 정권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조약의 체결, 양무파 대신들의 동남호보는 청조의 집권체제가 명백히 해체되어 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새로운 변혁 주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도시신사들은 양무운동기 이래 여해 개항장을 중심으로 출현한 근대적 언론매체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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