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평가자료]측전무후의 삶과 업적, 그리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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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수평가자료]측전무후의 삶과 업적, 그리고 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측전무후의 삶과 업적, 그리고 평가 >

1. 서 론

2. 본 론
1) 어린 시절
(1) 아버지와 어머니
(2) 부친을 따라간 발자취
2) 첫 번째 입궁
(1) 측천무후의 아름다움
(2) 입궁하여 재인이 되다.
(3) 재인으로 있으면서 배운 것.
(4) 황태자와의 사랑
(5) 비구니가 되다.
3) 두 번째 입궁
(1) 다시황궁으로 돌아옴
(2) 당 고종의 황후가 되다.
4) 황후 시절
(1) 황후 자리를 단단히 하다
(2) 국정에 개입하다.
(3) 측천무후가 정무처리를 보좌 할 때의 업적
5) 태후 시절
(1) 고종의 사망
(2) 중종의 폐위
(3) 반란을 진압하다
(4) 태후로 있을 시기의 업적
(5) 황제 등극을 준비하다.
6) 황제 시절
(1) 주나라를 세우다.
(2) 천하를 통치하다
(3) 황제로써의 업적
(4) 제위 계승 문제
7) 사 후
(1) 유제
(2) 장례
8) 측전무후에 관한 평가
(1)긍정적인 평가
(2) 부정적 평가

3. 결 론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을 불러들였다. 측천은 여릉왕을 불러들이는 것은 이씨를 태자로 삼으려면 반드시 제위 계승자인 이단과 여릉왕 이현사이에서 선택해야만했다. 이단은 본래 제위계승자 지위에 있으므로 황태자가 될 수 있었으나 대신들과 사사로이 접촉하여 측천무후의 신뢰를 잃고 있었고 반면 이현은 그가 다시 제위에 오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제위에 오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은혜에 감사하고 품었던 원망을 버리고 효를 다하였다. 또한 이단 보다 나이가 많은 이현을 태자로 삼는 것은 종법 관념에 어긋나지 않았다.
명당에서 영원히 화목하게 지낼 것을 맹서했고 이씨와 무씨가 통혼을 하였으며 충효와 겸양을 제창하였다.
이씨와 무씨의 관계는 점차 호전되었으며 측천무후는 연로하여 나날이 쇠약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하들이 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라고 측천무후에게 전의했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늙고 병든 상황에서도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다. 이는 이씨와 무씨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05년 정월 22일 장씨 형제가 모반을 꾀한다는 것을 구실로 정변이 일어났고 장씨 형제가 죽임을 당했으며 모반 세력은 측천무후가 요양하던 곳을 포위하고 주동자 이외의 어떤 자도 측천무후와 만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장간지는 측천무후의 어조로 ‘명황태자감국제’를 반포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행정 대권을 황태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705년 정월 25일, 중종이 복위하였다. 26일 측천무후는 상양궁으로 압송되었다. 정월 27일 중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양궁에 와서 측천무후를 ‘측천대성황제’로 높였다. 그러나 중종은 근본적으로 무씨가 다시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주’에 대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부정을 단행하였다. 이렇게 측천무후가 여러 해를 거쳐 확정한 시정 방침들은 순식간에 쓸모없게 되었다.
7) 사 후
(1) 유제
705년 11월 26일 상양궁의선거전에는 여든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유제’를 남겼다. 애석하게도 유제의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그 대강만이 《자치통감》권208에 남아있다. “유제: 황제의 칭호를 거두고 측천대황후라 칭하라. 왕씨, 소씨 두 집안과 저수량, 한원, 유석등의 친속을 모두 사면하라” 유제의 주된 내용은 다음 몇 가지이다. 첫째 제호를 거두고 측천대황후라 칭한다. 둘째 종묘에서 제사지낸 뒤 건릉에 합장토록 한다. 셋째 왕 황후, 소 숙비 등의 자손의 직업을 복원시킨다. 넷째 무삼사의 실봉 수를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원서기의 실봉을 늘려준다. 이는 중종 복위 이후 이 씨의 종묘사직은 회복되었고 무씨의 종묘사직은 사실상 폐기되어 ‘대주’는 종말을 고했다. 측천무후는 제호를 거두고 황후라 칭하여 이 씨와의 친근함을 나타낸 것 이다.
(2)장례
706년 정월 21일, 중종은 측천무후의 영가를 호위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장례 준비에 착수했다. 무삼사는 측천무후의 혼령이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위후는 측천무후를 본받고자하는 마음, 중종은 자신이 정권을 찬탈한 진상을 은폐하기위해 측천무후를 위해 성대한 장례를 거행하기로 했다. 측천무후는 측천대성황후라는 신분으로 건릉에 안장되었다.
8) 측전무후에 관한 평가
(1)긍정적인 평가
측천무후는 과거제도를 개편하고 인재 등용에 선입견을 같지 않았으며 간언을 잘 받아들이고 백성의 소리가 잘 들리도록 하였다. 또한 상벌을 분명히 하여 관리의 능률을 올렸으며 농업을 중시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였다.
(2)부정적 평가
측천무후는 딸과 아들 이홍을 죽인 비정한 어머니였으며 혹리를 중요하고 또 혹리들이 많은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전통시대의 일부 학 자는 측천무후를 천고의 잔인한 사람이라 하였고 심지어 동서고금에 둘도 없이 악하다 라고 까지 하였다. 또한 남총을 총애했으며 외척을 크게 등용하였으며 관리가 잘못을 하면 즉각 해임하여 관리를 남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측천 통치 후반기에 불교 사찰과 불상을 대대적으로 만들고 천추와 구정을 주조하고 명당과 통천궁을 건축하여 백성들의 조세와 요역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도호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 사회· 경제 발전이 느려졌다.
3. 결 론
측천무후는 당나라가 건국된 624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4살 때 처음으로 궁에 입궁한 다음 감업사에 비구니로 출가한 것을 제외하면 82세 때까지 궁전생활을 하였는데 660년 10월부터 정권에 참여하여 황후로 23년, 태후로 13년, 황제로 15년 정치를 주관하였다. 또한 측천무후는 당을 주나라로 바꾸었으며 과거제를 개혁하여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직언을 받아들여 백성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까지 전해지 도록한 탁월한 통치자였다.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직접 골라서 쓴 것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주된 동기였지만 무후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후가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이러한 측면이 갖는 중대한 의미는 오랫동안 중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가려져왔다. 이들은 무후가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을 들어 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해왔다. 그러나 무후가 확고한 기반 위에 새로운 통일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하여 당조의 안정은 공고하게 되었고 중국 문화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 참고문헌 -
- 신승하 / 중국사학사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0
- 천순천, 이혁재역 / 중국 오천년 / 다락원 / 2002
- 사식, 김영수역 / 황제들의 중국사 / 돌베게 / 2005
- 진정, 김효민역 / 중국 과거 문화사 / 동아시아 / 2003
- 도야마군지, 박정임역 / 측천무후 / 페이퍼로드 / 2006
- 레이황, 홍순도역 / 중국,그 거대한 행보 / 경당 / 2002
- 왕순홀, 정차근역 / 중국의 어제와 오늘 / 평민사 / 2003
- 장유유, 허유영역 / 황제 배후의 여인 / 에버리치홀딩스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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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04
  • 저작시기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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