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부∥ 승리의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
1.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유산된 민주혁명)
2. 왕정은 왜 왕따당했나 (-입헌군주제는 논의와 공화제의 도입)
3. 대한민국의 법통을 말한다 (-다시 생각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계승론)
4. 태극기는 정말 민족의 상징인가 (-외세의 의한 탄생과 파란만장한 역사)
5.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가 (-단일민족 신화의 허상)
6. ‘장군의 아들`, 신화는 없다 (-황당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2부∥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
1. 만주국의 그림자 (-대한민국의 교과서?)
2. ‘친일파’에 관한 명상 (-일재잔재 청산의 몇 가지 편향에 관하여)
3.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고문치사로 본 친일과 군사독재의 계보)
4.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 (-민간인 학살, 그 ‘죽이는 이야기’1)
5. ‘박멸의 기억’을 벗어던지자 (-민간인 학살 그 ‘죽이는 이야기’2)
∥3부∥ 또 다른 생존방식 ‘편가르기’
1.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똥과 된장’만큼 다른 수구와 보수의 차이)
2. 누가 ‘좌우대립’이라 부추기는가 (-만경대 방명록 소동)
3.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다시 도진 ‘사회주의 모함’병)
4. 수시로 되살아나는 연좌제 망령 (-조선시대도 이렇지는 않았다)
5.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 (-분단이 할퀴고 간 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가족사)
∥4장∥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1. 맥아더가 은인이라고?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서 있는 나라)
2. 정전협정의 ‘저주받은 유산’(-대미 예속의 강화, 이남의 군사주의화)
3. 주한미군, 뻔뻔할 자격 있다? (-사실상의 치외법권, SOFA의 역사)
4. 반미의 원조는 친일파였다. (-후천성 반미결핍증의 웃기는 역사)
5.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 광화문 촛불시위 거리에서 느끼는 감격)
∥5부∥ 병영국가 대한민국
1. 찬란한 ‘병영국가’의 탄생 (-신성한 국방의무’는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었나)]
2. 그들은 왜 말뚝을 안 박았을까 (-아직도 요원한 군사문화로부터의 해방)
3.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 (-국민개병제 아닌 ‘빈민개병제’)
4. 정약용도 두손 두발 다 들다 (-병역기피의 사회사1)
5.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병역기피의 사회사2)
1.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유산된 민주혁명)
2. 왕정은 왜 왕따당했나 (-입헌군주제는 논의와 공화제의 도입)
3. 대한민국의 법통을 말한다 (-다시 생각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계승론)
4. 태극기는 정말 민족의 상징인가 (-외세의 의한 탄생과 파란만장한 역사)
5.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가 (-단일민족 신화의 허상)
6. ‘장군의 아들`, 신화는 없다 (-황당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2부∥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
1. 만주국의 그림자 (-대한민국의 교과서?)
2. ‘친일파’에 관한 명상 (-일재잔재 청산의 몇 가지 편향에 관하여)
3.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고문치사로 본 친일과 군사독재의 계보)
4.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 (-민간인 학살, 그 ‘죽이는 이야기’1)
5. ‘박멸의 기억’을 벗어던지자 (-민간인 학살 그 ‘죽이는 이야기’2)
∥3부∥ 또 다른 생존방식 ‘편가르기’
1.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똥과 된장’만큼 다른 수구와 보수의 차이)
2. 누가 ‘좌우대립’이라 부추기는가 (-만경대 방명록 소동)
3.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다시 도진 ‘사회주의 모함’병)
4. 수시로 되살아나는 연좌제 망령 (-조선시대도 이렇지는 않았다)
5.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 (-분단이 할퀴고 간 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가족사)
∥4장∥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1. 맥아더가 은인이라고?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서 있는 나라)
2. 정전협정의 ‘저주받은 유산’(-대미 예속의 강화, 이남의 군사주의화)
3. 주한미군, 뻔뻔할 자격 있다? (-사실상의 치외법권, SOFA의 역사)
4. 반미의 원조는 친일파였다. (-후천성 반미결핍증의 웃기는 역사)
5.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 광화문 촛불시위 거리에서 느끼는 감격)
∥5부∥ 병영국가 대한민국
1. 찬란한 ‘병영국가’의 탄생 (-신성한 국방의무’는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었나)]
2. 그들은 왜 말뚝을 안 박았을까 (-아직도 요원한 군사문화로부터의 해방)
3.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 (-국민개병제 아닌 ‘빈민개병제’)
4. 정약용도 두손 두발 다 들다 (-병역기피의 사회사1)
5.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병역기피의 사회사2)
본문내용
들뿐 아니라 군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정통 관료’라는 말이 공무원사회에서 생성된 이상한 말이라면 한국사회 전반에서는 군사문화의 막강한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말로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 등이 있다.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가 군대 가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군대에 가서 ‘군인’, 그것도 인격을 차압당한 졸병이 되는 것이다. 군대에서 가장 큰 욕이 “말뚝 박아라.”이고, 제대하면서 군대생활한 동네를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국방의 의무를 흔쾌히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한 훈육장으로서의 병영과 그 기반으로서의 징병제를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3.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 (-국민개병제 아닌 ‘빈민개병제’)
현재의 국민개병제는 가히 허울뿐이라고 할 수 있다. 군 복무기간은 육군 26개월, 해군 28개월, 공군 30개월이며, 그들이 받는 월급은 한달 평균 2만원에 못 미친다. 휴가 나오면 가족에게 손 벌리고, 제대 뒤 복학하거나 취업하려면 막막하기만 한 사병들에게 최소한도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이제는 우리도 모병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더구나 상류층은 병역비리가 연일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면서 현역으로 복역했거나, 하는 중이거나, 해야 할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처지에서는 징병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전혀 살릴 수 없다. 이는 청년실업문제와도 연관이 된다. 의무적인 군복무가 청년들의 실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취업하자마자 일할 만 하면 군대 가야 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조건에 기꺼이 채용할 고용주는 별로 없을 것이다.
4. 정약용도 두손 두발 다 들다 (-병역기피의 사회사1)
고대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까지는 그러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 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했다. 이들은 점차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빠졌다. 그 이후로도 전쟁 상황으로 인해 때때로 군부가 중시되긴 했지만,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군역 등으로 대체되는 등 국방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 때 포 2필을 바치는 이른바 군역이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포 2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역을 거의 평생 져야 하니 농민들 사이에 군역을 피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노비보다 높은 양인의 신분을 군역 부담을 피하기 위해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같이,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이 후에도 이러한 군역기피를 줄이기 위하여, 호포법을 제정하기도 하고, 향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험을 치게 해 일정 점수에 미달한 자에게 포를 걷으려고 하는 등 갖가지 정책이 나왔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군제가 복잡해지면서 농민들도 자신이 어떤 군영의 군역을 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곳의 군역을 져야 하는 첩역의 폐단도 자주 일어났다. 농민의 부담이 이렇게 무겁다보니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쳐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갔다.
조선은 초기에는 국민개병제를 표방해 양반들도 군역을 져야 했지만, 세월이 흐르자 군역면제는 양반의 특권으로 자리잡았다. 불행히도 유교가 뿌리내린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 지배층의 덕목에 군복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인과 똑같이 군역을 지는 것은 오히려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상류층의 방어막이 될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나름대로 매우 엄격한 자기관리의 잣대가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잣대를 무엇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5.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병역기피의 사회사2)
해방 후에는, 특히 한국전쟁 기간 중 군대에 가는 것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고, 또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군에 가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고 얼어 죽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병역기피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 당시 병역기피의 주된 통로는 대학에 들어가 징집연기를 받는 것이었다.
1950년대 과도한 교육열에서 대학진학이 병역기피 수단이 된다는 점은, 그것이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분명히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분위기의 최대 수혜자는 사립대학이었다. 단기적으로는 병역기피의, 장기적으로는 출세의 사다리로 대학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농촌에서는 소를 팔아 아들들을 대학에 보냈다. 이처럼 사립대학이 급성장하고 사학비리가 만연하게 된 일등공신의 하나는 병역기피였다. 이어서 1960년대에도 내내 병역기피가 줄어들지 않았다. 자진신고와 일제단속이 되풀이되었지만, 후속조치가 따르지 않았고 당국의 태도가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병역기피에 대한 단속이 엄격하게 실시된 것은 2차 병무파동 뒤인 1973년부터다. 박정희는 특히 고위공직자나 재벌 등 상류층 자제의 병역의무 이행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 이들의 병적기록표에 ‘특’이라는 도장을 찍어 별도로 관리하게 했다. 이런 특수층 자제에 대한 특별관리는 1996년 국방부는 이런 특별관리가 상류층 자제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라며 폐지하기에 이른다.
이 후 벌어지는 특권층의 자기 자식 군대 빼돌리기는 수도 없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병역비리의 해법이 이러한 특권층들의 도덕성 회복일 수는 없다. 이는 제도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각종 병역특례 제도가 있고, 방위처럼 단기 복무가 있고, 병역자원은 넘쳐나 부모가 조금만 ‘애를 쓰면’ 현역으로 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에서 병역비리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병역문제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가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통 관료’라는 말이 공무원사회에서 생성된 이상한 말이라면 한국사회 전반에서는 군사문화의 막강한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말로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 등이 있다.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가 군대 가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군대에 가서 ‘군인’, 그것도 인격을 차압당한 졸병이 되는 것이다. 군대에서 가장 큰 욕이 “말뚝 박아라.”이고, 제대하면서 군대생활한 동네를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국방의 의무를 흔쾌히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한 훈육장으로서의 병영과 그 기반으로서의 징병제를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3.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 (-국민개병제 아닌 ‘빈민개병제’)
현재의 국민개병제는 가히 허울뿐이라고 할 수 있다. 군 복무기간은 육군 26개월, 해군 28개월, 공군 30개월이며, 그들이 받는 월급은 한달 평균 2만원에 못 미친다. 휴가 나오면 가족에게 손 벌리고, 제대 뒤 복학하거나 취업하려면 막막하기만 한 사병들에게 최소한도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이제는 우리도 모병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더구나 상류층은 병역비리가 연일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면서 현역으로 복역했거나, 하는 중이거나, 해야 할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처지에서는 징병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전혀 살릴 수 없다. 이는 청년실업문제와도 연관이 된다. 의무적인 군복무가 청년들의 실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취업하자마자 일할 만 하면 군대 가야 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조건에 기꺼이 채용할 고용주는 별로 없을 것이다.
4. 정약용도 두손 두발 다 들다 (-병역기피의 사회사1)
고대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까지는 그러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 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했다. 이들은 점차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빠졌다. 그 이후로도 전쟁 상황으로 인해 때때로 군부가 중시되긴 했지만,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군역 등으로 대체되는 등 국방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이 때 포 2필을 바치는 이른바 군역이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포 2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역을 거의 평생 져야 하니 농민들 사이에 군역을 피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노비보다 높은 양인의 신분을 군역 부담을 피하기 위해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같이,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이 후에도 이러한 군역기피를 줄이기 위하여, 호포법을 제정하기도 하고, 향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험을 치게 해 일정 점수에 미달한 자에게 포를 걷으려고 하는 등 갖가지 정책이 나왔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군제가 복잡해지면서 농민들도 자신이 어떤 군영의 군역을 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곳의 군역을 져야 하는 첩역의 폐단도 자주 일어났다. 농민의 부담이 이렇게 무겁다보니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쳐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갔다.
조선은 초기에는 국민개병제를 표방해 양반들도 군역을 져야 했지만, 세월이 흐르자 군역면제는 양반의 특권으로 자리잡았다. 불행히도 유교가 뿌리내린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 지배층의 덕목에 군복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인과 똑같이 군역을 지는 것은 오히려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상류층의 방어막이 될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나름대로 매우 엄격한 자기관리의 잣대가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잣대를 무엇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5.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병역기피의 사회사2)
해방 후에는, 특히 한국전쟁 기간 중 군대에 가는 것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고, 또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군에 가서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고 얼어 죽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병역기피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 당시 병역기피의 주된 통로는 대학에 들어가 징집연기를 받는 것이었다.
1950년대 과도한 교육열에서 대학진학이 병역기피 수단이 된다는 점은, 그것이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분명히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분위기의 최대 수혜자는 사립대학이었다. 단기적으로는 병역기피의, 장기적으로는 출세의 사다리로 대학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농촌에서는 소를 팔아 아들들을 대학에 보냈다. 이처럼 사립대학이 급성장하고 사학비리가 만연하게 된 일등공신의 하나는 병역기피였다. 이어서 1960년대에도 내내 병역기피가 줄어들지 않았다. 자진신고와 일제단속이 되풀이되었지만, 후속조치가 따르지 않았고 당국의 태도가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병역기피에 대한 단속이 엄격하게 실시된 것은 2차 병무파동 뒤인 1973년부터다. 박정희는 특히 고위공직자나 재벌 등 상류층 자제의 병역의무 이행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 이들의 병적기록표에 ‘특’이라는 도장을 찍어 별도로 관리하게 했다. 이런 특수층 자제에 대한 특별관리는 1996년 국방부는 이런 특별관리가 상류층 자제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라며 폐지하기에 이른다.
이 후 벌어지는 특권층의 자기 자식 군대 빼돌리기는 수도 없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병역비리의 해법이 이러한 특권층들의 도덕성 회복일 수는 없다. 이는 제도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각종 병역특례 제도가 있고, 방위처럼 단기 복무가 있고, 병역자원은 넘쳐나 부모가 조금만 ‘애를 쓰면’ 현역으로 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에서 병역비리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병역문제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가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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