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 과제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병력자원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여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된다고 발표했다. 1950년3월 이승만은 미국의 군 정원동결정책 때문에 징병제를 폐지하고 지원병제를 채택했다. 한국전쟁에서 병력손실을 매우 크게 입은 후 가두모집, 가택수색 등으로 강제로 병력을 보충했고, 이렇게 모여진 병력은 불과 100일만에 수많은 장정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고 말았다. 징병제도는 이렇게 국가가 강압적으로 국민들을 데려가고, 현재 이어지고 있는 것은 정말 꽃다운 나이에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슬픔이 있다. 나는 여자라서 군대를 가야할 의무는 없지만 주변의 친구나 동생들이 군대를 가는 것은 본인자신으로서는 굉장히 슬픈 일인 것 같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군인들을 위해서 나라는 조금만 더 군인들을 생각해서 행동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왜 말뚝을 안 박았을까 ... 2001/05/08 358호
현재 군부독재가 아닌 민간인 출신 대통령들이 지켜나가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군사독재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국에서 군이 급성장하여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을때, 1970년대 지식인들은 박정희가 가난한 농민출신의 군인이라는 점에서도 반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의 장교들은 해외유학을 다녀오는 경우도 굉장히 많아 교육수준이 높았던 집단이었다. 한국정치에서 군부가 강력한 집단이 될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미국과의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찰과 마찬가지로 군대의 상당수가 친일 인맥이 고스란히 보존된 집단이다. 과거 한국전쟁 초기에 이북과 중국을 상대로 패하여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었다. 미군은 이제 우리가 북한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예전에는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대기해있는것이 우리를 지켜주는거라 믿을수도 있었겠지만, 경제와 병력이 성장한 우리나라는 이제 더 이상 소수의 미군병력이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사실 미군이 우리나라에 있는것은 우리를 감시하는 것으로 느껴져 기분이 오히려 더 나쁘다. 만약 큰 사건이나 전쟁이 일어날 때 그때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것은 어떨까.. 미군이 저렇게 버티고 있는다는것이 좀 불편하고 싫다.
이제 모병제를 준비하자... 이 part는 한겨레신문의 홈페이지에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읽고 감상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정약용도 두손 두발 다 들다 ... 2002/09/04 425호
군대를 가기 싫어하는 것은 요즘이나 조선시대나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남자였더라도 만약 군대를 가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 같다. 물론 대부분의 남자들이 군대를 가고, 군대를 다녀와서 많은 경험을 쌓고 오지만 가기전의 기분은 절대 가고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지배층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해야 인정을 받았지만, 고려시대에는 지배층이 문신귀족으로 변하면서 점점 무는 뒤로 물러났다. 조선시대에는 양인들이 군대의 부담으로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만하다고 느껴지는게 이때의 군역은 16살부터 60살까지 지내는 것이였다. 나같아도 거의 젊음 평생을 거기에서 다 지내느니 스스로 노비, 아니면 승려라도 되는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는 공부를해서 향교에 입학하는것도 군역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결국 영조는 호포법을 실시하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군역이라는 이름아래에 농민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법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자꾸 양반들은 군대를 피해가고 농민들이 힘들어지자 뇌물을 바쳐 양반으로 신분상승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조선후기 신분제의 문란 속에 양반인구가 전체40%가 넘는다는 것도 군역기피자들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조선시대에 양반의 수가 이렇게 많은것은 당연 문제가 있다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하게 양반이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 족보를 고치며 양반으로 탈바꿈 한것인줄 알았는데, 사실상 이것이 군대때문이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지금도 연예인이나 재벌가의 아들들은 군대를 피하기 위해 별 방법을 다 쓰는데, 이때나 지금이나 군대를 싫어하는것은 변함이 없는것 같다.
상아탑은 병역비리탑? ... 2002/10/09 429호
일제치하시기에는 병역기피나 탈영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병역을 기피하며 산으로 들어가 자기들끼리 군사훈련을 하며 집단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일제에 의해 학병이나 징병으로 끌려간 뒤에도 탈출을 하여 중국본토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다. 1950년대에는 병역기피를 위한 주된 통로가 대학에 들어가 징집연기를 받는 것이었다. 이 당시의 과도한 교육열은 대학진학이 병역기피수단이 된다는 것이 아주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농촌에서는 소를 팔아 아들을 대학교에 보내기도 하여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그 외에도 병역기피를 위해 해외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않는 상류층도 많았다. 이승만정권이 몰락한뒤 병역미필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병역의무 불이행자 자진신고기간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병역기피는 심했고 이에 정부는 1973년 1월 병역법위반 등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다. 박정희정권이후 병역기피는 눈에 띄게 줄었고, 정두환집권 이후에는 석사장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렇게 법적으로 특별하게 조치를 가하게 되자 사람들도 하나둘씩 지켜야할 것은 지키며 군대에 갔다는 기록을 보면 역시 매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느껴진다. 군대를 가야하는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병역기피를 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에 정부에서 강한 제도를 마련한것이 매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본다. 지금도 거짓으로 군대를 가지 않게 하거나 공익으로 빠지는 연예인들은 매우 많은 비판을 받는데 이것은 해야할것은 다같이 하자는 입장이다. 나도 이렇게 빠지는 것보다 보기좋게 군대 갔다와서 사랑받는 연예인들이 더 보기좋고 정감이 간다.
  • 가격2,3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06.16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964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