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 립은 옛날에 하던 대로 어슬렁거리기도 하는 등 옛날 버릇으로 되돌아갔다. 옛 친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세월의 퐁파에 시달려 몸의 상태가 다소간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막 떠오르는 세대의 젊은이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이내 그들 사이에 호평을 바든 사람이 되었다.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이제는 게으름을 피워도 책망할 사람 하나 없는 행복한 나이에 이르게 되자, 그는 다시 한 번 호텔 앞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제 마을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고, 이른바 '전쟁 전'이라는 옛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잡담 속에 정규적으로 끼어들게 되었으며, 자기가 마비 상태에 있는 동안 일어났던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이 나라가 어떻게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자신이 죠지 3세 폐하의 백성이 아니라 합중국의 자유로운 국민이 되엇는가를 알게 되었다. 사실 립은 정치가가 아니어서, 국가와 제국의 변화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그 밑에서 신음해 왔던 특이한 형태의 전제 정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마 바람이 관장하는 정부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정부도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이제 결혼 생활이라고 하는 그의 목을 죄던 사슬에서도 풀려났다. 이제 밴 윙클 부인의 폭정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마음 내키는 대로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쩌다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게 되면, 그는 머리를 가로젓고 어깨를 으쓱 올린 다음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몸짓은 운명에 대한 체념의 표시로 도 읽힐 수 있고 또한 구원에 대한 즐거움의 표시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두리틀씨의 호텔을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해주곤 하였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할 적마다 몇 가지 점에서 내용이 바뀌곤 하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이는 틀림없이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이야기는 하나로 굳어져서 내가 위에서 전한 것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남자건 여자건 어린 아이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암기하다시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항상 그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척하였고, 립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그의 머리가 좀 돌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예외없이 모두 그의 이야기에 완전한 신뢰감을 보였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여름날 오후 캐츠킬 근처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나면, 이는 틀림없이 헨드릭 허드슨과 그의 선원들이 구주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근방에 사는 모든 공처가 남편들은 삶의 무게가 그들의 손을 무겁게 짓누를 때면 립 밴 윙클의 술병에서 술을 한 번 들이키고 마음을 가라앉혔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작품해설 - 익숙한 상상력의 서구적 형상화 우리는 옛부터 시간의 상대적 진행을 극대화한 설화에 익숙해 있다. 시간의 진행이 현저하게 빠른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현실로 복귀했을 때에 받게 되는 충격을 노린 것으로 그 충격의 내용은 주로 시간의 파괴력과 연관된 것이 많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속담을 남긴 옛 전설이나 무릉도원의 설화 같은 게 그러하다.
[립 밴 윙클]은 그런 동양적 상상력을 서구적으로 형상화한 특이한 작품이다. 립이 다른 시간궤를 경험하고 자신의 시간궤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설화에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나 주인공에게 남겨진 충격의 흔적은 아주 다르다.
그 차이는 먼저 서술과 묘사에서 드러난다. 동양의 설화는 애매한 시대와 추상적인 인물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시대배경은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며 묘사도 아주 사실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련된 현대의 단편과 정제되지 못한 민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차이는 다른 시간궤에 속한 사람들의 초월성에 대한 해명에 있다. 동양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신선이거나 자연의 특혜를 받은 이들, 혹은시간의 파괴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한이나 비원을 품을 이들 등으로 그 해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초기 네덜란드계 이민들이나 헨드릭 허드슨 선장과 그 배 반월호의 선원들이 시간을 초월해 나타나게 되었고, 또 왜 그들의 공간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지에 대해 설명이 없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초월성의 논리에 약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자의 상상력에 부과하는 작가의 숙제일까.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아무래도 그 경험의 충격이 주인공에게 남긴 흔적일 것이다. 동양의 주인공들은 그 충격으로 자신들도 초월을 지향하게 되거나 최소한 그 초월적 공간을 다시 찾아가려고 애를 쓰고 그 과정에서 흔히 현실과의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립에게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오래잖아 되찾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그게 서구인의 현실지향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 점만으로도 이 [립 밴 윙클]은 소설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눈여겨 봐두기를 권할 만한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미국 독립 초창기인 1783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한 어빙은 19세 때부터 사회풍자 기사나 극평을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 1807년에는 직접 잡지를 창간해 자신의 글을 싣기도 하는 등 매우 진취적이며 개척정신이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사 주재원과 공사관을 거치며 영국 스페인 등을 두루 여행한 그는 자신의 폭넓은 경험을 살린 작품 [스케치 북] [알함브라 전설] [대초원에의 여행]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다. 일찍부터 골드스미스 등 영국 작가에 심취해있던 그는 단아하고 로맨틱한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는데 반면 당시에 강력히 대두되던 미국 국민문학에의 요구를 외면해 문단에서 외톨이가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막 떠오르는 세대의 젊은이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이내 그들 사이에 호평을 바든 사람이 되었다.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이제는 게으름을 피워도 책망할 사람 하나 없는 행복한 나이에 이르게 되자, 그는 다시 한 번 호텔 앞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제 마을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고, 이른바 '전쟁 전'이라는 옛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잡담 속에 정규적으로 끼어들게 되었으며, 자기가 마비 상태에 있는 동안 일어났던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이 나라가 어떻게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자신이 죠지 3세 폐하의 백성이 아니라 합중국의 자유로운 국민이 되엇는가를 알게 되었다. 사실 립은 정치가가 아니어서, 국가와 제국의 변화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그 밑에서 신음해 왔던 특이한 형태의 전제 정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마 바람이 관장하는 정부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정부도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이제 결혼 생활이라고 하는 그의 목을 죄던 사슬에서도 풀려났다. 이제 밴 윙클 부인의 폭정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마음 내키는 대로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쩌다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게 되면, 그는 머리를 가로젓고 어깨를 으쓱 올린 다음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곤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몸짓은 운명에 대한 체념의 표시로 도 읽힐 수 있고 또한 구원에 대한 즐거움의 표시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두리틀씨의 호텔을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해주곤 하였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할 적마다 몇 가지 점에서 내용이 바뀌곤 하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이는 틀림없이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이야기는 하나로 굳어져서 내가 위에서 전한 것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남자건 여자건 어린 아이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암기하다시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항상 그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척하였고, 립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그의 머리가 좀 돌아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예외없이 모두 그의 이야기에 완전한 신뢰감을 보였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여름날 오후 캐츠킬 근처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나면, 이는 틀림없이 헨드릭 허드슨과 그의 선원들이 구주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근방에 사는 모든 공처가 남편들은 삶의 무게가 그들의 손을 무겁게 짓누를 때면 립 밴 윙클의 술병에서 술을 한 번 들이키고 마음을 가라앉혔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작품해설 - 익숙한 상상력의 서구적 형상화 우리는 옛부터 시간의 상대적 진행을 극대화한 설화에 익숙해 있다. 시간의 진행이 현저하게 빠른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현실로 복귀했을 때에 받게 되는 충격을 노린 것으로 그 충격의 내용은 주로 시간의 파괴력과 연관된 것이 많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속담을 남긴 옛 전설이나 무릉도원의 설화 같은 게 그러하다.
[립 밴 윙클]은 그런 동양적 상상력을 서구적으로 형상화한 특이한 작품이다. 립이 다른 시간궤를 경험하고 자신의 시간궤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설화에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나 주인공에게 남겨진 충격의 흔적은 아주 다르다.
그 차이는 먼저 서술과 묘사에서 드러난다. 동양의 설화는 애매한 시대와 추상적인 인물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시대배경은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며 묘사도 아주 사실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련된 현대의 단편과 정제되지 못한 민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차이는 다른 시간궤에 속한 사람들의 초월성에 대한 해명에 있다. 동양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신선이거나 자연의 특혜를 받은 이들, 혹은시간의 파괴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한이나 비원을 품을 이들 등으로 그 해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초기 네덜란드계 이민들이나 헨드릭 허드슨 선장과 그 배 반월호의 선원들이 시간을 초월해 나타나게 되었고, 또 왜 그들의 공간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지에 대해 설명이 없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초월성의 논리에 약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자의 상상력에 부과하는 작가의 숙제일까.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아무래도 그 경험의 충격이 주인공에게 남긴 흔적일 것이다. 동양의 주인공들은 그 충격으로 자신들도 초월을 지향하게 되거나 최소한 그 초월적 공간을 다시 찾아가려고 애를 쓰고 그 과정에서 흔히 현실과의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립에게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오래잖아 되찾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그게 서구인의 현실지향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 점만으로도 이 [립 밴 윙클]은 소설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눈여겨 봐두기를 권할 만한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미국 독립 초창기인 1783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한 어빙은 19세 때부터 사회풍자 기사나 극평을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 1807년에는 직접 잡지를 창간해 자신의 글을 싣기도 하는 등 매우 진취적이며 개척정신이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사 주재원과 공사관을 거치며 영국 스페인 등을 두루 여행한 그는 자신의 폭넓은 경험을 살린 작품 [스케치 북] [알함브라 전설] [대초원에의 여행]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다. 일찍부터 골드스미스 등 영국 작가에 심취해있던 그는 단아하고 로맨틱한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는데 반면 당시에 강력히 대두되던 미국 국민문학에의 요구를 외면해 문단에서 외톨이가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