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이집트와 이라크의 정치행정발전
<목 차>
I. 서론
Ⅱ. 정치행정발전
1. 다양한 학자들의 정치, 행정발전의 기준
2. Heady의 정치, 행정발전의 기준
Ⅲ. 이라크의 정치행정발전
1. 이라크 정치행정의 배경
2. 사담후세인의 정치장악 과정
3. 이라크 전쟁
4. 이라크 전쟁의 이후 정치행정 및 경제 흐름
Ⅳ. 이집트의 정치행정발전
1. 군부의 탄생과 통치
2. 군부 통치의 양식
3. 직접 통치기간
4. 유사 민간 정치 제도의 설립
5. 민간 전문가의 충원
6. 군부의 효과적 통제
7. 사회 통제의 방식
8. 군사정권의 문제점
9. 군사 정권의 변화
Ⅴ. 결론
<목 차>
I. 서론
Ⅱ. 정치행정발전
1. 다양한 학자들의 정치, 행정발전의 기준
2. Heady의 정치, 행정발전의 기준
Ⅲ. 이라크의 정치행정발전
1. 이라크 정치행정의 배경
2. 사담후세인의 정치장악 과정
3. 이라크 전쟁
4. 이라크 전쟁의 이후 정치행정 및 경제 흐름
Ⅳ. 이집트의 정치행정발전
1. 군부의 탄생과 통치
2. 군부 통치의 양식
3. 직접 통치기간
4. 유사 민간 정치 제도의 설립
5. 민간 전문가의 충원
6. 군부의 효과적 통제
7. 사회 통제의 방식
8. 군사정권의 문제점
9. 군사 정권의 변화
Ⅴ. 결론
본문내용
말해, 사다트는, 이집트 대중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를 보다 보장하는 제한된 정치적 자유화를 통해, 나세르 시절의 경직된 권위주의적 정치 사회 구조를 완화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자유화 시도가 순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경직된 통제 구조를 은폐하려는 겉치레가 아나라” 구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경제 위기를 타개하려는 신정권의 진정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의도가 진정한 것이었다 하더라고, 사다트의 정치적 자유화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실패는 무엇보다도 사다트이 암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3) 자유화의 실패와 그 이후
이집트 자유화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요인은, 첫째 자유화로 인한 다양한 사회세력의 정치화, 둘째 이러한 정치화에 수로를 제공할 정치 제도의 부재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 제도화를 불가능하게 만든 개인적 권위주의 통치의 지속성을 발견한다.
정치 체계의 자유화는 이집트 사회 여러 세력의 정치화를 부채질하였고, 이는 정권에 대한 급증하는 압력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경제적, 정치적 개방의 결과 사회적 갈등은 점점 더 계급 지향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다트 재임 기간 계급의 구분은 더욱 심해졌고, 계급 갈등 또한 악화되었다. 따라서 1971년부터 1977년에 걸쳐 이집트 사회에 만연했던 정치적 소요는 계급 갈등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이 계급 갈등의 증가는 부자와 빈자의 사이를 점점 벌여 놓은 경제적 자유화의 직접적 결과였다. 경제적 자유화의 실패는 이집트의 경제적 위기를 가중했고 계급 갈등을 심화한 바, 이는 1977년 1월 폭동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사다트의 가부장적 지배 또한 계급 갈등의 약화에 한 몫 했다.
계급 갈등은 각 정치 집단의 대립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정치 체계의 개방은 이집트의 두 정치 진영, 즉 좌파와 우파간의 이념적 대립을 가중했다. 정치적 대립은 정권이 두 극단세력, 이슬람 우파와 극좌파를 정치 과정에서 제외함으로써 더욱 과격해졌다. 이 두 가장 과격하고 전투적인 집단의 제외는, 이들로 하여금 불법적 방법에 의한 정치 투쟁에 호소케 함으로써, 이집트 정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다트의 가부장적 통치의 방법은 이러한 가중되는 정치 소요와 사회 불안을 해결할 제도적 장치 마련을 불가능케 했다. 사다트는 “ 가부장적 지도자 그 자체”였다. 그의 정치적 자유화 노력이 진정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전통적 권력구조를 재건할 가부장적 지배 체제의 확립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동지인 나세르의 카리스마를 갖지 못했다. 나세르는 그이 카리스마로 정치 제도의 부재를 어느 정도 상쇄했으나, 사다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더욱이 나세르가 탄압과 대규모 사회 보장 정책의 혼합을 통해 상당 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으나, 사다트는 카리스마의 부재와 사회 환경의 변화로 이를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나세르 정권의 기본 제도적, 지성적 구조를 변경하는데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의 정권은 새로 등장하는 정치경제 문제를 해결치 못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다트는 그의 재임 말기에 이르러 이집트 현실에서 점점 괴리되어 갔다. 그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유기적 바탕의 정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시대 착오적 통치자로 점점 전락하여 갔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운명은 군부 집권 이전의 파룩왕의 그것과 흡사 하였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사다트는, 나세르와 흡사하게,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폈다. 그는 1977년 역사적인 예루살렘 방문에 이어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조인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집트 사회로부터의 사다트 고립의 심화였다. 즉, 사다트의 만용적인 시도는 그의 이전 어느 정책과도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부터 충격적이었던 그것은 최종 목표 달성에 필요한 깊이 있는 지지와 조심스러운 계획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 평화 공세의 기원이 국내적 압력을 해소하려는데 있었던 만큼, 그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자 사다트 정권에 대한 국내적 압력은 더욱 가중되어 갈 뿐이었다.
결국 사다트는 그의 개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탄압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탄압은 사회 집단의 전투적 행동화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 집단들 가운데 특히 전투적 회교 조직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치화는 1981년 7월 카이로에서의 회교 광신도들과 콥트교도 사이의 충동과, 같은 해 8월 정부에 의해 진압된 회교 기도회 등으로 나타났다. 회교 광신도들과 사다트간의 충돌은 결국 1981년 10월 6일 이들에 의한 사다트의 암살로 귀결되었다. 사다트는 죽을 당시 이집트 현실과의 접촉을 잃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 국민의 지지뿐 아니라 그들과의 의사 소통 교류마저 잃고 있었다.
사다트 사후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가 정해진 절차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Ⅴ. 결론
본 보고서에서는 정치행정 발전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이집트와 이라크의 정치행정 발전을 군사정권에 입각하여 어떻게 전개되어져 왔는지 알아보았다. 정치행정발전은 앞서 말했듯이 정치체제부문에 있어서 정치, 행정의 발전은 반드시 일반 시민의 참여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과두정치체제나 독재체제 등에서도 정치, 행정의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에서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아직도 중동국가들은 뒤떨어진 정치행정을 발전시키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하지만 실패를 하는 요인 중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서방 선진국의 성공한 사례가 있는 모델들을 기존의 제도에 덮어씌우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중동국가에서는 성공된 모델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그 이유는 모델이 바뀐다는 의미는 즉 모든 정치행정 체제가 바뀐다는 의미이고 서방국가의 모델이 중동국가의 상황과 체제 또 관습 등에 맞지 않는다는 결과이다.민주주의를 재건하고 발전된 형태의 정치행정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중동국가만의 고유한 모델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의도가 진정한 것이었다 하더라고, 사다트의 정치적 자유화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실패는 무엇보다도 사다트이 암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3) 자유화의 실패와 그 이후
이집트 자유화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요인은, 첫째 자유화로 인한 다양한 사회세력의 정치화, 둘째 이러한 정치화에 수로를 제공할 정치 제도의 부재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 제도화를 불가능하게 만든 개인적 권위주의 통치의 지속성을 발견한다.
정치 체계의 자유화는 이집트 사회 여러 세력의 정치화를 부채질하였고, 이는 정권에 대한 급증하는 압력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경제적, 정치적 개방의 결과 사회적 갈등은 점점 더 계급 지향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다트 재임 기간 계급의 구분은 더욱 심해졌고, 계급 갈등 또한 악화되었다. 따라서 1971년부터 1977년에 걸쳐 이집트 사회에 만연했던 정치적 소요는 계급 갈등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었다. 이 계급 갈등의 증가는 부자와 빈자의 사이를 점점 벌여 놓은 경제적 자유화의 직접적 결과였다. 경제적 자유화의 실패는 이집트의 경제적 위기를 가중했고 계급 갈등을 심화한 바, 이는 1977년 1월 폭동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사다트의 가부장적 지배 또한 계급 갈등의 약화에 한 몫 했다.
계급 갈등은 각 정치 집단의 대립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정치 체계의 개방은 이집트의 두 정치 진영, 즉 좌파와 우파간의 이념적 대립을 가중했다. 정치적 대립은 정권이 두 극단세력, 이슬람 우파와 극좌파를 정치 과정에서 제외함으로써 더욱 과격해졌다. 이 두 가장 과격하고 전투적인 집단의 제외는, 이들로 하여금 불법적 방법에 의한 정치 투쟁에 호소케 함으로써, 이집트 정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다트의 가부장적 통치의 방법은 이러한 가중되는 정치 소요와 사회 불안을 해결할 제도적 장치 마련을 불가능케 했다. 사다트는 “ 가부장적 지도자 그 자체”였다. 그의 정치적 자유화 노력이 진정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전통적 권력구조를 재건할 가부장적 지배 체제의 확립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동지인 나세르의 카리스마를 갖지 못했다. 나세르는 그이 카리스마로 정치 제도의 부재를 어느 정도 상쇄했으나, 사다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더욱이 나세르가 탄압과 대규모 사회 보장 정책의 혼합을 통해 상당 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으나, 사다트는 카리스마의 부재와 사회 환경의 변화로 이를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나세르 정권의 기본 제도적, 지성적 구조를 변경하는데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의 정권은 새로 등장하는 정치경제 문제를 해결치 못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다트는 그의 재임 말기에 이르러 이집트 현실에서 점점 괴리되어 갔다. 그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유기적 바탕의 정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시대 착오적 통치자로 점점 전락하여 갔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운명은 군부 집권 이전의 파룩왕의 그것과 흡사 하였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사다트는, 나세르와 흡사하게,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폈다. 그는 1977년 역사적인 예루살렘 방문에 이어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조인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집트 사회로부터의 사다트 고립의 심화였다. 즉, 사다트의 만용적인 시도는 그의 이전 어느 정책과도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부터 충격적이었던 그것은 최종 목표 달성에 필요한 깊이 있는 지지와 조심스러운 계획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 평화 공세의 기원이 국내적 압력을 해소하려는데 있었던 만큼, 그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자 사다트 정권에 대한 국내적 압력은 더욱 가중되어 갈 뿐이었다.
결국 사다트는 그의 개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탄압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탄압은 사회 집단의 전투적 행동화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 집단들 가운데 특히 전투적 회교 조직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치화는 1981년 7월 카이로에서의 회교 광신도들과 콥트교도 사이의 충동과, 같은 해 8월 정부에 의해 진압된 회교 기도회 등으로 나타났다. 회교 광신도들과 사다트간의 충돌은 결국 1981년 10월 6일 이들에 의한 사다트의 암살로 귀결되었다. 사다트는 죽을 당시 이집트 현실과의 접촉을 잃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 국민의 지지뿐 아니라 그들과의 의사 소통 교류마저 잃고 있었다.
사다트 사후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가 정해진 절차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Ⅴ. 결론
본 보고서에서는 정치행정 발전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이집트와 이라크의 정치행정 발전을 군사정권에 입각하여 어떻게 전개되어져 왔는지 알아보았다. 정치행정발전은 앞서 말했듯이 정치체제부문에 있어서 정치, 행정의 발전은 반드시 일반 시민의 참여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과두정치체제나 독재체제 등에서도 정치, 행정의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에서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아직도 중동국가들은 뒤떨어진 정치행정을 발전시키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하지만 실패를 하는 요인 중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서방 선진국의 성공한 사례가 있는 모델들을 기존의 제도에 덮어씌우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중동국가에서는 성공된 모델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그 이유는 모델이 바뀐다는 의미는 즉 모든 정치행정 체제가 바뀐다는 의미이고 서방국가의 모델이 중동국가의 상황과 체제 또 관습 등에 맞지 않는다는 결과이다.민주주의를 재건하고 발전된 형태의 정치행정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중동국가만의 고유한 모델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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