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여성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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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혼인의 형태로 본 지위

3. 夫妻의 형태로 본 지위

4.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

5. 夫妻의 형태와 지위의 변화

6. 맺음말

7. 비평

본문내용

아래에 다처제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후에 조선 태종시에 이르러 성리학을 적용하면서 先代까지 존재한 다처제를 소급하여 처첩제로 바꾸고 가족윤리로서 왕실의 안정과 강화를 추진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철저히 분리되고 불간섭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므로 이성간의 의존도가 심하였다고 본다.
7. 비평
3가지 측면에서 필자에 대하여 비평하고자 한다.
첫째, 고려시대 夫妻說을 보이는 사례의 부적절성이다. 첫 번째 사료로 보이는 왕건의 즉위 전의 사료는 일반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왕건은 즉위 전에는 토호의 세력이기는 하나 변화하는 시기의 일반적인 고려의 토호라고 볼 수 없으며 장수라는 신분 또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료보다는 권순형의 <고려시대 壻留婦家婚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사료들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둘째, 夫妻간의 역할분담에서 보였던 근거의 당위성이 부족하다. 필자는 세 가지의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데 첫째로 婢가 奴보다 값이 비싼 사치 노예의 성격으로 여성이 생산활동에 노와 공동으로 작업하지 않았다고 추측한다. 이는 젊은 여자노비에 국한된 것으로 夫妻間의 역할분담으로 확대해석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로 사별한 경우 짧은 시간 안에 재혼하는 사례를 근거로 들었다. 이 또한 사회적 풍속이라고 이야기 될 수 있으며 부처간의 역할분담을 설명하기에는 빈약함이 보인다. 셋째로 낮은 이혼율을 들고 있다. 이는 당시 시대의 폐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太宗時에 성리학에 따른 妻妾制 도입에 관한 나의 작은 생각이다. 필자는 가족윤리를 사회와 국가윤리로 확대하여 동일한 원리로 사회의 보수성을 유지하려는 유교의 전통적 속성으로 妻妾制를 도입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一妻制에서 妻妾制로의 法制化는 변화한 사회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강력한 몽고의 영향력 아래서의 박유의 多妻制의 주장이 실패한 사례를 보았을 때 성리학의 학문적인 이유만으로 설명이 힘들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몽고의 지배를 받은 東北面에서 세력을 다진 조선왕실에서 시작을 한다. 이는 몽고의 多妻制의 영향을 받은 많은 지배세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배경에서 변방에서 중앙으로 나타나는 多妻制와 전통적인 모습을 가지는 一妻制와 사회적 충돌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妻妾制는 태종시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충돌을 절충하는 모습으로 성리학을 이용하여 나타난 제도라고 생각한다.

키워드

고려,   여성,   지위,   역활
  • 가격1,3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8.03.31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8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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