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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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회사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교회사
* 서 론 *
1. 교회사의 정의
기독교의 기원, 발달,인간 세계와의 관계, 구원 역사의 조직화 등을 연구하
는 학문이다.
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 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 과거의 일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 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 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적 세력임을 알게 된다.
5) 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 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 교회사에는 교리사,사상사, 교회사 교회 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
함된다.
3) 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A.D.1-590)..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시대(1-100)..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100-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2) 중세사(590-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 개혁 시작까지
(1) 과도 시대(590-800).. 선교 발달기
(2) 로마 교회 성장 시대 (800-1073)..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분리
(3) 로마 교회 전성시대(1073-1303)..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 교회 쇠퇴 시대(1303-1517)..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 현재)..종교 개혁까지
(1) 종교 개혁 시대(1517-1648)..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까지.
(2) 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3) 최근세 시대(1800-현재)

5.한국교회사.....교회성장 운동까지

본문내용

는 동안에 성장했으며 여러 해 동안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다. 위그노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16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킬 때 분명히 쓰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마르틴 루터의 저작물들이 유럽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시작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최초의 순교자가 1523년 화형에 처해졌다. 1534년 10월 가톨릭 미사의식을 맹렬히 공격하는 플래카드가 거리와 왕궁에서 발견되자 가톨릭 세력은 큰 충격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장 칼뱅을 포함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피신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곧 귀족들 가운데서도 지지자가 생겨났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도 계속되었으며 1명씩 처형되던 관행이 대량학살로 비화했다.
2) 1562 위그노전쟁(~98)
1562∼159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전쟁. 위그노(Huguenot)라는 말은 가톨릭 교도들이 칼뱅파 신교도를 멸시해서 불렀던 말이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도 16세기 전반기부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J.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1536)》 출판 뒤에 신교도는 칼뱅파를 중심으로 가톨릭과 확실하게 결별했다. 이후 날로 심해지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교도는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왕국에 깊숙히 침투하였다. 신·구 양파의 대립은 마침 그때 벌어지고 있던 명문 귀족간의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발루아왕가는 명문 귀족간의 미묘한 균형 위에 군림하고 있었는데, 1559년 프랑수아 2세의 외척인 기즈가(家)가 세력을 확대하자, 그 균형은 무너졌다. 기즈가가 열광적인 구교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항해서 반(反)기즈파 귀족들이 신교도와 손을 잡았다. 이렇게 되자 신·구 양파의 신앙상의 대립은 단번에 정치적 대립양상을 띠게 되었다. 1560년 샤를 9세의 즉위와 함께 섭정을 시작한 왕모(王母)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양파의 균형에 입각해서 관용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양파의 대립은 격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마침내 1562년 기즈공(公) 측에 의한 신교도살해(바시의 학살)를 계기로, 이후 1598년까지 8차에 걸친 위그노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과 화의(和議)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1572년 양파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된 신교도의 총수 앙리 드 나바르(뒤에 앙리 4세)와 왕의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결혼식은 구교파에 의해서 신교도 학살에 이용되어, 양파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성 바르톨로뮤축일밤의 학살). 이 학살은 다른 지방으로도 확대되어 신교도 약 8000명이 살해되었지만, 신교도는 폭군격퇴를 외치면서 저항운동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 뒤 구교도는 과격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는데, 과격파는 1576년 기즈 일당을 중심으로 구교동맹을 결성했다. 온건파는 신앙상의 대립보다도 왕국의 통일을 중시해 폴리틱파라고 불렸는데, 그 대표적 사상가에 J. 보댕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트린을 중심으로 한 왕가에 신·구 양파를 더한 3세력의 싸움은, 1585년에 시작된 이른바 <3앙리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앙리 드 기즈에 이어 앙리 3세가 암살되고, 1589년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로 즉위했다. 부르봉가(家)의 새 왕은 국내의 분열 및 외국, 특히 에스파냐와 교황청의 간섭에 직면해,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로써 폴리틱파의 지지를 얻어, 다음 해 2월에는 파리에 입성하게 되었고, 1598년 <낭트칙령(勅令)>을 공표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로써 내란은 종결되었다. 위그노전쟁은, 신·구 양파의 신앙상의 무력항쟁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두드러지게 정치적인 항쟁이기도 했으며, 신흥 부르주아층의 대두와 신구 양파를 각각 지원한 외국의 의도도 있어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 전쟁의 결과 약체화된 왕권 회복을 위해 앙리 4세는 절대왕정 확립을 위한 재건에 착수했다.
3) 1572 성 바돌로매의 축제의 학살
1572년 8월 22일, 피가 낭자한 이 악마적인 만행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일전에 자신의 가지들에서 고통을 겪었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나무의 뿌리를 단번에 뽑아 버리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은 그의 여동생과 프로테스탄트들[16-17세기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Huguenots)을 의미한다]의 수장이자 거두인 나바르 군주(the prince of Navarre) 사이의 결혼을 교활하게 제의했다. 이 신중치 못한 결혼은 8월 18일 파리에서 부르봉(Bourbon)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식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높은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치러졌다. 그들은 교황이 함께한 자리에서 무척이나 성대한 만찬을 들었고, 파리에서는 국왕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 일이 있고서 나흘 째 되던 날, 의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팔에 총상을 입은 그 군주는(꼴리니, Coligny)는 이미 작고하신 모친의 목사인 모르(Maure)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나의 형제여, 난 내가 진실로 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소. 그분의 가장 거룩한 목적을 위해 이렇게 부상을 입었으니 말이오.” 비당(Vidam)이 그에게 도망가라고 충고했으나 그는 파리에 머물렀고, 얼마 안있어 방주(Bemjus)에게 살해되었다. 후에 그는 그 사령관만큼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는 결코 보지 못했노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떤 신호가 떨어지면 시 전역에서 즉각적으로 학살을 감행하라는 지령이 병사들에게 내려졌다. 그 사령관을 죽인 그들은 그를 창문 밖 길바닥으로 내던졌고, 거기서 그의 머리가 베어져 교황에게로 보내졌다. 그에 대한 분노를 여전히 삭이지 못해 하던 그 흉악한 로마카톨릭 교도들은 그의 양팔과 음부를 잘랐고, 그의 시체를 길거리 여기저기에 3일 동안 질질 끌고 다니다가 발목을 밧줄로 묶어 시 외각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위대하고 훌륭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 즉 로쉬푸꼴 백작(Count Rochfoucault), 죽임 당한 사령관의 사위인 뗄리니우(Telinius), 앙또뉴(Antonius), 라벨리(Ravely)의 후작인 끌라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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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6페이지
  • 등록일2008.04.13
  • 저작시기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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