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리스쩡과 우지후이는 이회영의 협조 요청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만주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만주에는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으니 만주에서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같은 항일활동을 전개한다면 광범위한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할 수 있을 것이며 장래에 중국 정부도 만주를 당연히 한인들의 자치구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이회영은 한중 공동전선 결성은 가능하지만 무기와 재정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을 그대들이 잘 알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우지후이와 리스쩡은 그대들처럼 물욕과 영예를 모르는 담백한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싸울 결심이 있다면 우리가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에게 연락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장쉐량의 심복으로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인물들과 비밀연락이 되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했다. 이때가 1932년 9월이었다. 이에 고무된 남화한인연맹은 활동 무대를 다시 만주로 옮기기로 하고 젊은 동지를 파견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이회영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젊은 동지들이 적극 만류하자 이회영은 이렇게 답했다.
내 늙은 사람으로서 덥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또 나는 만주의 신징(新京:창춘)에 사위 장기준이 있으니 주거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내가 먼저 만주에 가서 근거지를 마련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통지하면 뒤따라 오기 바란다.
이때 이회영이 동지들과 세운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1)만주에 조속히 연락 근거지를 만들 것. 2)주변 정세를 세밀히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할 것. 3)장기준을 앞세워 지하조직을 만들 것. 4)관동군사령관(武藤)의 암살 계획을 세울 것.
이런 목적을 지닌 이회영은 드디어 1932년 11월초 다롄(大連)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달이 환한 밤에 아들 규창은 홀로 이회영을 황포강 부두의 기선에 승선시킨 후 절을 하고 떠나보냈다.
이회영이 근거지만 만들면 상하이에서는 리스쩡우지후이 등과 연락하여 장쉐량과 연결을 맺은 후 한중일 세 나라 동지들이 만주로 갈 계획이었다. 만주에서 한중일 공동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각 도시에 편의대(便衣隊) 파괴부대를 배치해 도시와 촌락을 연결하며 결사항전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2년 11월17일 창춘에 있던 딸 규숙은 다롄수상경찰서의 연락을 받았다. 황급히 다롄으로 달려가니 이회영은 수상경찰서에서 이미 숨져 있었다. 일제는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꾸며댔지만 규숙은 이회영의 몸에 핏자국이 아롱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문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면을 확인하니 선혈이 낭자하였고 대포(大袍:중국식 겉옷)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국내 신문에는 이 사건이 다롄 수상서 유치중 괴(怪)! 의사(縊死:목매어 죽음)한 노인,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 취조중 유치장 창살에 목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러면서 ○○운동의 중대인물이라는 부기를 달았다. ○○은 독립이란 말을 검열 과정에서 지운 것이다. 66세, 삼한갑족의 신분으로 부귀를 갖고 태어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끝내 목숨까지 바친 것이었다.
우당 이회영이 다롄 부두에 내리자마자 수상서에 체포된 데는 엄청난 내막이 담겨 있었다. 밀고였다. 이회영은 자신의 만주행을 중형 이석영(李石榮)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그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석영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만주로 간다고 답했는데, 그 자리에 이태공(李太公)과 연충렬(延忠烈)이란 두 청년이 있었다. 연충렬과 이태공은 모두 임정 요인들의 친척이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말했던 것인데 이들이 일제에 밀고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탐지한 남화연맹에서는 두 청년을 유자명이 관리하던 상하이 근교의 남상(南翔)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유인했고, 자백을 받은 후 처단해 고인의 한을 달랬다.
1932년 11월28일 새벽 화장한 고인의 시신이 고국 장단(長湍) 역에 도착했다. 변영태(卞榮泰)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유진태이득년 등 수백 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한줌의 뼈로 돌아온 노 혁명가를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이회영은 비로소 부인 이은숙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은숙이 품에 안은 6세의 규동(圭東)은 그때까지 아버지 이회영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이 모녀의 슬픈 호곡을 뒤로 한 채 이회영은 경기도 개풍군 선영에 안장되어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회영의 일대기:
서울 출생 / 1906년 도산 안창호 선생과 신민회 결성 / 헤이그 밀사 파견 계획 수립후 건의 / 1910년 국치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 / 1911년 한인 자치단체 경학사 설립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 / 1919년 신흥 무관학교 설립 / 1924년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재중국 조선 무정부 주의자 연맹 조직 / 1931년 항일 구국 연맹 결성, 항일 구국 연맹을 통하여 상하이 북역사건,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사건, 텐진항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 폭파사건, 텐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지휘 / 1932년 만주로 잠입중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 / 1932년 11월 17일 일경에 의하여 고문치사
독립한국은 반드시 사민 평등한 만민이 자유 평등을 누릴수 있고, 따라서 공평하게 다같이 행복을 누리며 발전할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우리 독립 한국에 실현 되어야 한다. ..." 우당 이회영 선생은 성재 이시형 선생의 친형으로서 최초의 항일 군사 교육 기관인 신흥 무관학교의 설립자였다. 조선조 명문가 출신인 그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헤익 밀사 사건을 계획 고종에게 건의 실행한 것을 시작으로 망국후 만주와 중국일대에서 치열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의해 체포, 고문 치사 당했다. 그의 나이 66세 였으며, 묘소는 황해도에 있다. 그를 밀고한 밀정은 우당의 삼남이며, 이후 일본공사 암살 미수 사건으로 13년간 복역한 이규창 선생 등이 처단하였다. 1990년 종로구 동숭동에 우당 기념관이 설립되었으며, 중국 퉁화시에 1990년 신흥 무관학교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이에 이회영은 한중 공동전선 결성은 가능하지만 무기와 재정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을 그대들이 잘 알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우지후이와 리스쩡은 그대들처럼 물욕과 영예를 모르는 담백한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싸울 결심이 있다면 우리가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에게 연락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장쉐량의 심복으로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인물들과 비밀연락이 되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했다. 이때가 1932년 9월이었다. 이에 고무된 남화한인연맹은 활동 무대를 다시 만주로 옮기기로 하고 젊은 동지를 파견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이회영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젊은 동지들이 적극 만류하자 이회영은 이렇게 답했다.
내 늙은 사람으로서 덥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또 나는 만주의 신징(新京:창춘)에 사위 장기준이 있으니 주거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내가 먼저 만주에 가서 근거지를 마련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통지하면 뒤따라 오기 바란다.
이때 이회영이 동지들과 세운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1)만주에 조속히 연락 근거지를 만들 것. 2)주변 정세를 세밀히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할 것. 3)장기준을 앞세워 지하조직을 만들 것. 4)관동군사령관(武藤)의 암살 계획을 세울 것.
이런 목적을 지닌 이회영은 드디어 1932년 11월초 다롄(大連)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달이 환한 밤에 아들 규창은 홀로 이회영을 황포강 부두의 기선에 승선시킨 후 절을 하고 떠나보냈다.
이회영이 근거지만 만들면 상하이에서는 리스쩡우지후이 등과 연락하여 장쉐량과 연결을 맺은 후 한중일 세 나라 동지들이 만주로 갈 계획이었다. 만주에서 한중일 공동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각 도시에 편의대(便衣隊) 파괴부대를 배치해 도시와 촌락을 연결하며 결사항전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2년 11월17일 창춘에 있던 딸 규숙은 다롄수상경찰서의 연락을 받았다. 황급히 다롄으로 달려가니 이회영은 수상경찰서에서 이미 숨져 있었다. 일제는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꾸며댔지만 규숙은 이회영의 몸에 핏자국이 아롱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문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면을 확인하니 선혈이 낭자하였고 대포(大袍:중국식 겉옷)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국내 신문에는 이 사건이 다롄 수상서 유치중 괴(怪)! 의사(縊死:목매어 죽음)한 노인,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 취조중 유치장 창살에 목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러면서 ○○운동의 중대인물이라는 부기를 달았다. ○○은 독립이란 말을 검열 과정에서 지운 것이다. 66세, 삼한갑족의 신분으로 부귀를 갖고 태어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끝내 목숨까지 바친 것이었다.
우당 이회영이 다롄 부두에 내리자마자 수상서에 체포된 데는 엄청난 내막이 담겨 있었다. 밀고였다. 이회영은 자신의 만주행을 중형 이석영(李石榮)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그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석영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만주로 간다고 답했는데, 그 자리에 이태공(李太公)과 연충렬(延忠烈)이란 두 청년이 있었다. 연충렬과 이태공은 모두 임정 요인들의 친척이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말했던 것인데 이들이 일제에 밀고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탐지한 남화연맹에서는 두 청년을 유자명이 관리하던 상하이 근교의 남상(南翔)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유인했고, 자백을 받은 후 처단해 고인의 한을 달랬다.
1932년 11월28일 새벽 화장한 고인의 시신이 고국 장단(長湍) 역에 도착했다. 변영태(卞榮泰)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유진태이득년 등 수백 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한줌의 뼈로 돌아온 노 혁명가를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이회영은 비로소 부인 이은숙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은숙이 품에 안은 6세의 규동(圭東)은 그때까지 아버지 이회영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이 모녀의 슬픈 호곡을 뒤로 한 채 이회영은 경기도 개풍군 선영에 안장되어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회영의 일대기:
서울 출생 / 1906년 도산 안창호 선생과 신민회 결성 / 헤이그 밀사 파견 계획 수립후 건의 / 1910년 국치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 / 1911년 한인 자치단체 경학사 설립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 / 1919년 신흥 무관학교 설립 / 1924년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재중국 조선 무정부 주의자 연맹 조직 / 1931년 항일 구국 연맹 결성, 항일 구국 연맹을 통하여 상하이 북역사건,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사건, 텐진항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 폭파사건, 텐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지휘 / 1932년 만주로 잠입중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 / 1932년 11월 17일 일경에 의하여 고문치사
독립한국은 반드시 사민 평등한 만민이 자유 평등을 누릴수 있고, 따라서 공평하게 다같이 행복을 누리며 발전할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우리 독립 한국에 실현 되어야 한다. ..." 우당 이회영 선생은 성재 이시형 선생의 친형으로서 최초의 항일 군사 교육 기관인 신흥 무관학교의 설립자였다. 조선조 명문가 출신인 그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헤익 밀사 사건을 계획 고종에게 건의 실행한 것을 시작으로 망국후 만주와 중국일대에서 치열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의해 체포, 고문 치사 당했다. 그의 나이 66세 였으며, 묘소는 황해도에 있다. 그를 밀고한 밀정은 우당의 삼남이며, 이후 일본공사 암살 미수 사건으로 13년간 복역한 이규창 선생 등이 처단하였다. 1990년 종로구 동숭동에 우당 기념관이 설립되었으며, 중국 퉁화시에 1990년 신흥 무관학교 기념관이 준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