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작품 분석
2. 등장 소재 의미 분석
3.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사변형 구조에서 본 <피아노>
4. 폐미니즘과 피아노
2. 등장 소재 의미 분석
3.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사변형 구조에서 본 <피아노>
4. 폐미니즘과 피아노
본문내용
게 향하고 엄마로서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서 한 사람의 주체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 에이다를 지켜 볼 수 없었던 스튜와트는 그녀의 언어 즉 손을 끊어버리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며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언어보다 하나의 주체로서 살려는 그녀의 의지가 더 강했다. 남자의 지배질서, 더 깊이 들어가면 누군가의 지배 질서 하에 안주하기보다는 하나의 주체로서 살기를 더 원했다.
그리고 손 즉 그녀의 언어를 끊어버렸어도(영화에서 에이다는 손이 잘려나가도 침묵으로 무표정으로 있다.) 자신의 에이다는 오히려 침묵으로서 힘과 저항을 나타낸다. 에이다의 침묵은 가부장적 규제에 저항하고 이를 거부하며 여성을 구속하는 남성적 언어체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플로라 역시 스튜와트처럼 엄마가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것을 원하기보다는 자신의 엄마로 또 아빠의 아내로서 현실체제 안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엄마 편에서 서기 보다 아빠의 편에 서서 엄마를 억압한다.
이들이 만나면서 상보관계에서 모순관계로 바뀐 것은 피지배계급이 지배질서 하 즉 지배계급이 만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주체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에이다가 베인즈에게 가지 않고 스튜와트 곁에서만 지냈으면 지극히 평범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처음 관계였던 에이다와 플로라, 스튜와트와 베인즈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적어도 상보관계로 평온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틀을 벗어나는 에이다를 스튜와트와 플로라가 견제하면서 이들의 관계들이 모순관계로 변한 것이다.
왜 우리는 아버지 질서 하 에 있는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는 것일까?
엄마는 자신의 주체로서 사랑을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을려는것인가? 우리 안에도 이 상황이 일어난다면 플로라처럼 행동하겠는가?
엄마는 자신을 희생하고 그 지배질서 하에 순종해야만 하는가?
4. 폐미니즘과 피아노
페미니즘은 남녀동등권을 목표로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법률적 권리를 확장하고자하는 주의이다. 기존에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이 실제 여성에 비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크게 왜곡되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 페미니즘 영화는 여성의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며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피해를 고발하는 것, 두 번째는 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 마지막은 여성이 전사로 등장하여 여성상을 강하게 나타내는 영화이다. 여기서 보면 피아노 영화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피아노에서 주인공 에이다는 자아를 찾아가는 것인데 피아노를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이고 이 에이다를 진정으로 이해는 사람은 남편인 스튜와트가 아니라 원주민 베인즈였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을 선택해서 베인즈에게 갔다. 영화는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바다를 향해 가다가 피아노와 함께 에이다가 빠지는데 가만히 있다가 선택의 길에서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피아노를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즉 정통적인 여성상이 물에서 죽는 것이고 그녀는 다른 모습으로 탈피한것이다.
그리고 나서 피아노를 치지 안는 것이 아닌 다시 베인즈가 만들어준 손가락으로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에이다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금속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를 때마다 딱 딱 거리는 소리가 난다.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를 찾은 그런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세상과 단절한 성대를 열어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녀가 선택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 그녀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바다 속 피아노에 걸려있는 에이다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자신 없던 모습과 자신이 피아노에 얽매였었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어머니의 자궁처럼 감싸줄 수 있는 바다에서 피아노를 버리고 온 자신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궁에 모든 것을 버리고 탯줄을 끊어버리고 나와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상징했던 피아노를 끊어버리고 전과 다른 모습으로 그녀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 안에 있는 태아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질서 하에 있는 여성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 주체로서의 여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손 즉 그녀의 언어를 끊어버렸어도(영화에서 에이다는 손이 잘려나가도 침묵으로 무표정으로 있다.) 자신의 에이다는 오히려 침묵으로서 힘과 저항을 나타낸다. 에이다의 침묵은 가부장적 규제에 저항하고 이를 거부하며 여성을 구속하는 남성적 언어체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플로라 역시 스튜와트처럼 엄마가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것을 원하기보다는 자신의 엄마로 또 아빠의 아내로서 현실체제 안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엄마 편에서 서기 보다 아빠의 편에 서서 엄마를 억압한다.
이들이 만나면서 상보관계에서 모순관계로 바뀐 것은 피지배계급이 지배질서 하 즉 지배계급이 만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주체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에이다가 베인즈에게 가지 않고 스튜와트 곁에서만 지냈으면 지극히 평범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처음 관계였던 에이다와 플로라, 스튜와트와 베인즈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적어도 상보관계로 평온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틀을 벗어나는 에이다를 스튜와트와 플로라가 견제하면서 이들의 관계들이 모순관계로 변한 것이다.
왜 우리는 아버지 질서 하 에 있는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는 것일까?
엄마는 자신의 주체로서 사랑을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을려는것인가? 우리 안에도 이 상황이 일어난다면 플로라처럼 행동하겠는가?
엄마는 자신을 희생하고 그 지배질서 하에 순종해야만 하는가?
4. 폐미니즘과 피아노
페미니즘은 남녀동등권을 목표로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법률적 권리를 확장하고자하는 주의이다. 기존에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이 실제 여성에 비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크게 왜곡되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 페미니즘 영화는 여성의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며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피해를 고발하는 것, 두 번째는 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 마지막은 여성이 전사로 등장하여 여성상을 강하게 나타내는 영화이다. 여기서 보면 피아노 영화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피아노에서 주인공 에이다는 자아를 찾아가는 것인데 피아노를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이고 이 에이다를 진정으로 이해는 사람은 남편인 스튜와트가 아니라 원주민 베인즈였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을 선택해서 베인즈에게 갔다. 영화는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바다를 향해 가다가 피아노와 함께 에이다가 빠지는데 가만히 있다가 선택의 길에서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피아노를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즉 정통적인 여성상이 물에서 죽는 것이고 그녀는 다른 모습으로 탈피한것이다.
그리고 나서 피아노를 치지 안는 것이 아닌 다시 베인즈가 만들어준 손가락으로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에이다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금속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를 때마다 딱 딱 거리는 소리가 난다.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아를 찾은 그런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세상과 단절한 성대를 열어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녀가 선택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 그녀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바다 속 피아노에 걸려있는 에이다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자신 없던 모습과 자신이 피아노에 얽매였었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어머니의 자궁처럼 감싸줄 수 있는 바다에서 피아노를 버리고 온 자신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궁에 모든 것을 버리고 탯줄을 끊어버리고 나와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상징했던 피아노를 끊어버리고 전과 다른 모습으로 그녀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 안에 있는 태아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질서 하에 있는 여성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 주체로서의 여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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