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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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식을 부추기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오히려 봉건제를 강화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반일 운동은 민씨 정권의 문호 개방을 저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투쟁 방식도 유생만의 전통적인 형태인 '상소운동'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1880년 다시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대한 봉건 유생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그 발단은 '조선책략' 때문이었다. '조선책략'이 발단이 된 반일 척사 운동 단계에서는 화이론적 양이관에 논리적 근거를 둔 위정척사 사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운동이 확산되면서 대상도 민씨 척족은 물론 개화파를 공격하는 반정부, 반개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개화의 현실을 위정 척사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수용하려는 자도 있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인 척사론에 기반을 둔 반일 척사 운동은 거의 모든 경우 봉건 유생들이 직접 궁궐 앞에 집단적으로 나타나 상소하는 '복합상소'의 형태를 띠고 벌어졌다. 봉건 정부는 이러한 반일 척사 운동에 대해서 초기에는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사상적 기반과 영향력을 생각하여 회유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개화 정책의 추진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정치적 붕괴의 위기에 몰린 이들의 반대는 완강하였다. 결국 봉건 정부는 이들에 대한 회유책을 포기하고 무력으로 강력하게 탄압함으로써 이 운동을 강제로 잠재웠다.
지금까지 살펴 본 위정척사상은 근대 문명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경제적 침략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 서구열강의 위협에 직면하여 민족의 주체성, 정통성, 통합성을 확립함으로서 당시의 대내외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등장한 사상이라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란 현실 고수가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을 바르게 파악하여 논리적으로 새로운 사상에 이르게 하는 교량을 놓는 선험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한민족으로서는 현실적 위협 세력이었던 서구를 영구하고 그들의 형이하의 학문, 즉 器의 학문을 습들하여 한편으로는 부국강병을 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적인 개화의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민족 과제였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위정척사사상과 그 정책적 구현으로서의 쇄국양이책은 시대를 역행하는 처사였으며, 한민족의 근대화를 지연시켰고 그 결과 한민족이 세계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역량을 합량하지 못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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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5.02
  • 저작시기200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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