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붕당전개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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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붕당전개와 의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조선 전기 붕당정치의 전개

2. 붕당의 의미

3. 붕당정치의 전개

4.탕평책

본문내용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6) 서인의 노소론의 대립
신임사화(경종 1년 1721) :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노론 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 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
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을 하다가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노론은 경종 즉
위 뒤 1년만에 연잉군(延燥君: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노론이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태도 변화를 보임으로써 소론 측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론 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辛丑獄事).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 즉 남인(南人)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변으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燎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다. 이 옥사는 노소론간의 대립이 경종 즉위 후 왕에 대한 충역 시비의 형태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3.탕평책
연잉군의 1721년 왕세제 책봉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즉위한 그 해에 정언 이정소(李廷積)가 왕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그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燎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仁元王后) 김대비(숙종의 계비)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소론측은 우의정 조태구(趙泰)를 필두로 시기 상조론을 펴 반대했으나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이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이 역공의 명분을 얻어 이 일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신축옥사). 이듬해 1722년에 소론은 기세를 모아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남인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하였다.(임인옥사). 옥안(獄案)에는 왕세제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 왕세제가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연잉군은 왕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영조는 왕위에 등극하면서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탕평책은 숙종 때부터 실시되었으나, 숙종은 편당적인 환국정치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탕평책이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영조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소론과 노론을 적절하게 견제하였으나, 소론은 정국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이인좌의 난과 나주괘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처벌 결과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정국은 노론 중심으로 주도되었으며,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762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죽임을 반대하는 시파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인정하는 벽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쥐에 갇혀 죽게 되었으며 정국은 노론 벽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위임하였으며, 세손은 왕위 등극의 위기를 모면하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 외조(外祖)인 홍봉한(洪鳳漢) 계열과 반(反)홍봉한 계열을 포함한 탕평당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노론청류를 등용하고 규장각(奎章閣)과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등을 통해 친위세력을 키워 나감으로써 왕권의 기초를 다졌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노론청류뿐만 아니라 채제공(蔡濟恭)과 같은 남인 소론계 일부 등을 중용하였다. 기존의 노론 탕평당 계열은 영조 말에 이미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홍봉한 계열[扶洪派]과 반홍봉한 계열[攻洪派]로 분열되어 있었다. 정조는 왕권강화의 토대를 닦은 후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상권을 형성시키고자 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임오의리(壬午義理)는 이미 공홍파와 부홍파가 분열하였던 것처럼 영조 말 이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 후 임오의리를 둘러싼 논란을 억제하면서 왕권강화를 달성한 다음, 재위 12년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위상을 자신의 의향대로 설정해 나갔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정조 주도하의 정국에 참여하였던 계열이나 그 대척에 서 있던 벌열(閥閱)세력 등의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보다 심화되었다. 채제공 등 소수 남인으로서는 이 문제가 노론중심의 정국운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소재였으므로 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문제에 대한 정조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무리가 벽파로 결집되어,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부류를 시류에 편승한다는 의미로 시파라 하여 배척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정조가 사도세자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심화되었다. 임오의리와 정조의 정책을 둘러싼 시 벽의 대립은 순조 초년 경주김씨와 안동김씨가 대립하게 되는 중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참 고 자 료♠
1.naver
www.naver.com/백과사전
http://cafe.naver.com/maisa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0044
http://blog.naver.com/sisyphus72?Redirect=Log&logNo=60014785442
2.empas
http://blog.daum.net/kmchang/235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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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03
  • 저작시기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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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67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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