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조사(정효공주와 정혜공주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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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조사(정효공주와 정혜공주묘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1절. 발해에 대한 새로운 고찰

제 2절. 발해는 왜 우리의 역사인가
1. 발해의 성립과 발전
발해건국
2. 발해의 지방 통치 체제
3. 발해의 대외 교류
(1) 신라와의 대외관계
(2) 당과의 대외관계
4. 발해의 건축 문화
5.발해에 대한 중국의 역사인식

제 3절. 발해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제 1절. 발해에 대한 새로운 고찰
▶상경성 안에 있는 발해국 지도
정혜 공주
정효 공주
참고문헌

본문내용

)·널방(玄室)·탑(塔)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에 설치된 무덤길은 수평거리가 7.1m로서, 무덤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나팔모양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2차례에 걸쳐 수축되었다. 벽돌을 쌓아 막아놓은 무덤길을 지나면 길이 1.9m의 널길에 이르는데, 중간에 판돌문과 나무문을 각각 만들었다. 문 안쪽에는 정효공주 묘지가 세워져 있었다. 널방 바닥은 지면에서 3.4m 되는 지하에 만들었는데, 4벽은 장방형 파란벽돌(靑塼)로 쌓되 남벽을 제외하고는 안으로 약간 경사지도록 하였다. 널방은 남~북 길이 3.1m, 동~서 너비 2.1m, 높이 1.9m이다. 널방과 널길에는 벽과 천장에 백회를 발라 벽화를 그리고,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다. 널방 가운데에 벽돌을 쌓아 남~북 길이 2.4m, 동~서 너비 1.45m, 높이 약 0.4m의 널받침(棺臺)을 만들었다. 널받침은 2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천장은 장방형(長方形) 벽돌과 장대석을 이용하여 여러 단의 평행고임을 한 뒤에 큰 판돌을 동서로 몇 개 덮어 만들었다. 무덤 위에는 방형(方形) 탑을 쌓았는데, 이미 무너져 남~북 길이 5.65m, 동~서 너비 5.5m인 기초만 남아 있다.
무덤 양식으로 보건대,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아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또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발해의 독특한 양식으로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이 불교와 습합되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앞에는 무덤을 관리하던 건물이 서 있었고, 산 아래에는 무덤에 딸린 사원도 있었다.
일찍 도굴되어서 내부가 교란되고 유물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남녀 각 1인의 유골이 수습되어 공주 부부가 합장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밖에 벽화와 묘지(墓誌)를 비롯하여 도용편(陶俑片), 금동(金銅) 장식품, 금동 못, 쇠못, 칠기편, 글씨가 새겨진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널방의 동·서·북쪽 벽과 널길의 동·서쪽 벽에 그려진 벽화는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12명인 인물상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인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묘지(墓誌)는 1980년에 완전하게 발굴되었다.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들었으며,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규형(圭形)을 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너비, 두께가 105×58×26㎝이다. 정면에 18행, 728자의 묘지문이 해서체(楷書體)로 음각되어 있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글자가 깨끗하게 남아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문은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 문장으로서, 12행의 서문(序文)과 5행의 명문(銘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문장이 정혜공주(貞惠公主)의 것과 거의 같다. 정혜공주 묘지와 함께 발해인이 남긴 진귀한 사료로 주목되었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文王)시대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문왕의 넷째 딸로 정효공주(貞孝公主)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문왕의 존호(尊號)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으며, 그가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복귀하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왕에 대해서 황상(皇上)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던 사실은 그가 당시에 황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측에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속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묘지문에는 유교 경전을 비롯하여 중국의 문학 작품들이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왕 시대에 유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존호 가운데에 사용된 ‘금륜성법(金輪聖法)’은 불교적인 용어로서 문왕이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본떠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표방하였던 사실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적 요소는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탑장(塔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정효공주를 칭송하기 위해 한나라 때의 고사를 잘못 인용한 예도 있어서, 당시 발해 학문의 한계성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제2편 발해(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발해정효공주묘발굴청리간보(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 사회과학전선 1982-1, 1982)
<정효공주 묘> 정혜공주묘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8.06.14
  • 저작시기2008.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9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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