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또 공손룡은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흰 돌과 단단한 돌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희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이고, 단단하다는 것은 만져 보고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보기만 해서는 단단한지를 알 수 없고 만지기만 해서는 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진다.
둘째,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돌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물체 가운데는 희지만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단단하지만 희지 않은 것도 있다. 따라서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명제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단단하고 흰 돌을 인식할 때 먼저 시각을 통해 희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촉각을 통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나누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두 가지를 통일적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단단하고 흰 돌은 우리의 감각 이전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손룡의 이러한 논리는 중국 고대의 여러 명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합니다. 공손룡은 당시의 사회 혼란이 개념 규정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 상식을 부정하는 참 의미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춘추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여섯 학파로 나누어 그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 글에서 명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정교한 문구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엄밀하게 밝혀서, 남들이 자기 뜻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개념을 명확히 밝히려다가 상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명가와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장자도 "입으로는 남을 이길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 탄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순자는 한걸은 더 나아가 "이상한 주장을 다루기 좋아하는 기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혹평했습니다.
과연 명가의 논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담의 '상식을 벗어났다'고 한 것처럼 명가의 실제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동쪽이 옳다고 할때 서쪽을 말했으며, 북쪽을 옳다고 할 때 남쪽을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는 남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따르게 할 필요도 없었고 반드시 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철학의 생명은 비판에 있습니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을 부순 명가의 논리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입니다.
우리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미국을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러 가지로 도운 진정한 우방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상식을 넘어 신화로 굳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와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문제가 되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몇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고 반미를 이슈로 한 학생들의 격렬한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대다수 사람들은 철없는 학생들이 미국의 신경을 건드려서 오랜 우의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골 농부들까지도 미국을 친구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 왔을 뿐 진정한 우리의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관계에서 우방이란 속빈 강정이기 쉽습니다. 미국이 베푼 많은 무상 원조는 우리를 자신들의 시장 경제에 넣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구호의 변화만큼이나 많이 바뀌어 왔습니다. 초기에는 북진 통일이었고, 나중에는 멸공, 승공으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뜻 있는 사람들의 과감한 노력과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정부의 태도 변화가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다양한 교류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 있는 상식들이 많습니다.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니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식들은 본질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신화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아야 한다'라든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뱁새는 부지런히 황새를 쫓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꾸면 어떨까요? 아마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감한 전환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처럼 뛰어난 논리성을 갖추었던 명가가 왜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명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그러나 분석적인 방법은 동양적인 사유 체계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의학의 경우를 보면,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도 해부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의성으로 불린 화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실제로 화타에게는 23번의 수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화타 식의 방법은 뒤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 같은 방법론이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토양이 척박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 상황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은 법가 사상의 지원을 받은 진나라가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끝나게 됩니다. 진나라는 초기부터 도량형이나 많은 문물 제도를 통일시켰고, 나아가 분서 갱유를 통해 사상마저 통일시키려 했습니다. 진나라는 얼마 가지 못했지만, 바로 뒤를 이은 한나라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사실 통일 국가는 혼란기 동안 흔들렸던 많은 부분을 상식 차원에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아래서 상식을 부정하는 명가 사상이 후대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첫째, 흰 돌과 단단한 돌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희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이고, 단단하다는 것은 만져 보고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보기만 해서는 단단한지를 알 수 없고 만지기만 해서는 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진다.
둘째,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돌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물체 가운데는 희지만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단단하지만 희지 않은 것도 있다. 따라서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명제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단단하고 흰 돌을 인식할 때 먼저 시각을 통해 희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촉각을 통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나누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두 가지를 통일적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단단하고 흰 돌은 우리의 감각 이전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손룡의 이러한 논리는 중국 고대의 여러 명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합니다. 공손룡은 당시의 사회 혼란이 개념 규정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 상식을 부정하는 참 의미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춘추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들을 여섯 학파로 나누어 그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 글에서 명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정교한 문구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엄밀하게 밝혀서, 남들이 자기 뜻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개념을 명확히 밝히려다가 상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명가와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장자도 "입으로는 남을 이길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 탄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순자는 한걸은 더 나아가 "이상한 주장을 다루기 좋아하는 기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혹평했습니다.
과연 명가의 논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담의 '상식을 벗어났다'고 한 것처럼 명가의 실제 목표는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동쪽이 옳다고 할때 서쪽을 말했으며, 북쪽을 옳다고 할 때 남쪽을 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는 남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따르게 할 필요도 없었고 반드시 참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철학의 생명은 비판에 있습니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상식을 부순 명가의 논리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입니다.
우리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미국을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러 가지로 도운 진정한 우방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상식을 넘어 신화로 굳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와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문제가 되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몇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고 반미를 이슈로 한 학생들의 격렬한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대다수 사람들은 철없는 학생들이 미국의 신경을 건드려서 오랜 우의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골 농부들까지도 미국을 친구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 왔을 뿐 진정한 우리의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국제 관계에서 우방이란 속빈 강정이기 쉽습니다. 미국이 베푼 많은 무상 원조는 우리를 자신들의 시장 경제에 넣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구호의 변화만큼이나 많이 바뀌어 왔습니다. 초기에는 북진 통일이었고, 나중에는 멸공, 승공으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뜻 있는 사람들의 과감한 노력과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정부의 태도 변화가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다양한 교류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제 있는 상식들이 많습니다.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니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식들은 본질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신화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아야 한다'라든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뱁새는 부지런히 황새를 쫓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꾸면 어떨까요? 아마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감한 전환이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처럼 뛰어난 논리성을 갖추었던 명가가 왜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명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은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그러나 분석적인 방법은 동양적인 사유 체계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의학의 경우를 보면,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도 해부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의성으로 불린 화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실제로 화타에게는 23번의 수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화타 식의 방법은 뒤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 같은 방법론이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토양이 척박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정치 상황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은 법가 사상의 지원을 받은 진나라가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끝나게 됩니다. 진나라는 초기부터 도량형이나 많은 문물 제도를 통일시켰고, 나아가 분서 갱유를 통해 사상마저 통일시키려 했습니다. 진나라는 얼마 가지 못했지만, 바로 뒤를 이은 한나라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사실 통일 국가는 혼란기 동안 흔들렸던 많은 부분을 상식 차원에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아래서 상식을 부정하는 명가 사상이 후대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