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지방사 연구와 동족마을
3. 진도 동족마을의 기원과 형성과정
4. 진도 동족마을의 지리와 지형적 특징
5. 진도 동족마을의 농지현황
6. 동족마을의 농업조건
7. 동족마을의 가옥들
8. 결 론
2. 지방사 연구와 동족마을
3. 진도 동족마을의 기원과 형성과정
4. 진도 동족마을의 지리와 지형적 특징
5. 진도 동족마을의 농지현황
6. 동족마을의 농업조건
7. 동족마을의 가옥들
8. 결 론
본문내용
께 있었다.
③ 오산마을의 경우 산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역시 산록 경사면 하단에 발달하였다. 배후의 산이 높아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흘러 내려가는 도랑이 곳곳을 흐르고 있다. 마을 역시 집촌임과 동시에 괴촌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와집은 11채에 불과해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이다. 따라서 이 마을도 지체높은 부유한 양반이 다수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齋室도 대개 마을 서쪽의 고도가 높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3곳의 커다란 샘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밖에도 샘은 몇개 더 있었다고 생각된다.
④ 석현마을은 남쪽에 산이 있어 마을 전체는 북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각 가옥은 동향을 하고 있는 것이 많으며, 남향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마을은 도로로 인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윗마을은 윗마을대로, 아랫마을은 아랫마을대로 집촌임과 동시에 괴촌이다. 기와집은 윗마을에 9채로 집중되어 있고, 아랫마을에는 전혀 없다. 이에서 볼 때 윗마을이 아랫마을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식수는 샘의 형태로 확보하였는데 6곳이 확인된다. 산에서 흐르는 물은 윗마을의 동쪽 가운데를 관통해 흐르고, 아랫마을 서쪽을 경유하여 흐른다. 당산제를 매해 정월에 지내고 있다. 재실은 마을의 남쪽과 서쪽에 마을에서 떨어진,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⑤ 포산마을은 마을 중앙을 경유하는 도로로 인해 둘로 나뉘어 있다. 마을은 산록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분포한다. 가옥의 형태에서 볼 때 집촌임과 동시에 괴촌이라 할 수 있다. 기와집은 윗마을에 3채, 아랫마을에 5채가 있으나, 전체 가구에서 보면 그 수가 적다고 할 수 있다. 식수는 샘의 형태로 확보되는데 3곳이 확인된다. 산에서 호르는 물은 마을의 동쪽을 통해 흐르며, 마을 골목길과 나란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재실은 마을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⑥ 칠전마을은 바로 뒷산은 높지 않으나 동북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가옥은 산록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하단부는 평지이다. 기와집은 16채에 이르나, 역시 전체에서 볼 때 수가 적다. 재실은 마을의 상단과 마을 앞의 산과 동쪽의 골짜기에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식수는 5곳에서 확보하고 있으나, 2곳은 샘의 형태이지만, 나머지 3곳은 우물로 보인다. 마을의 뒷산이 높지 않기 때문에, 지표 가까이에서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8. 결 론
진도에는 선사시대이래 사람이 거주하여 여러 개의 군현이 있었으나, 고려말 왜구의 침입 이후 진도의 읍치가 내륙으로 옮겨갔고, 주민들도 대거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진도의 마을은 세종대 이후 유입된 주민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세종대에는 100여호에 5,6백명의 인구가 있었으며, 18세기에는 6천여 호, 2만을 상회하는 인구가 진도에 거주하였다. 조선후기 진도를 대표하는 성씨를 보면 진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없고, 내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만이 존재하였다. 진도를 대표하는 6개 동족마을의 5개 성씨는 復郡과정에서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거나 殉節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이들 가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였다. 동족마을은 여러 성씨가 雜居하다가 한 성씨가 유력해지면서 형성되었으며, 동족마을의 확고한 위치는 入鄕祖가 들어온 후 몇 세데를 경유한 뒤였다. 동족마을은 자연조건의 혜택이 많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건너온 성씨들이기 때문에 마을은 육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해안에 위치하지 않고, 진도의 내지에 자리하였다. 따라서 潮水가 미치는 感潮지대가 아니고, 干潟地가 발달한 곳도 아니었다. 배후에 비교적 높은 산을 두고, 가옥들은 산록 경사면에 배치되었으며, 농지들은 대지 주변과 마을 앞에 분포하였다. 동족마을은 식수·경작지·연료 등의 확보에서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말하자면 촌락이 발달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식수는 지하수가 湧出되는 지표 가까운 지점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동족마을이 형성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기반이 확보되어야 했다. 당시에는 농업이 가장 중요하였기에 동족마을은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하천이 흐로고 있으며, 그 주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대규모의 저수지를 축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저수지 없이도 농사가 어느정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배후에 산이 있어 지표 가까이에 지하수맥이 있어 농사에 유리하였다. 그 논은 '고래실논'이라 지칭되었다. 이 논은 旱害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였으며, 가장 귀하게 여겼다. 소위 門前沃畓이 그것이었다. 논 이외에도 가옥 주위에는 밭이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동족마을의 경우 논과 밭 가운데 논의 비중이 더컸다고 판단된다. 동족마을의 농지소유는 1910년대의 시정을 보면 크게 불균등하여 소규모 농지를 보유한 자가 많고, 그에 반해 대규모 농지를 보유한 자가 적어 심각한 계층분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동족마을이라고 하지만 내부성원 사이에는 심각한 경제적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동족마을의 가옥은 산이 평지와 만나는 산록 경사면에 자리하였다. 산을 북쪽이나 서쪽에 두고 있었고 마을 전체가 동향 또는 남향하고 있었으며, 건물도 남향이나 동향이 대부분이었다. 배후의 산이 남쪽에 있는 경우에도 각 건물은 남향 또는 동향을 하고 있었다. 가옥은 일정한 공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불규칙히고 자연발생적인 塊村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붕은 瓦家가 많지 않아, 그 가세가 내륙의 동족마을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식수는 대개가 샘의 형태로 확보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선조의 제사를 모시는 齋室은 마을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진도의 동족마을을 형성 발전시킨 가문은 내륙의 가문보다 격이 떨이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와가의 수가 많지 않은 데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내륙의 저명한 동족마을보다 지형조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고, 농지조건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진도 내에서는 다른 마을보다는 지형조건이나 농업조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③ 오산마을의 경우 산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역시 산록 경사면 하단에 발달하였다. 배후의 산이 높아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흘러 내려가는 도랑이 곳곳을 흐르고 있다. 마을 역시 집촌임과 동시에 괴촌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와집은 11채에 불과해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이다. 따라서 이 마을도 지체높은 부유한 양반이 다수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齋室도 대개 마을 서쪽의 고도가 높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3곳의 커다란 샘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밖에도 샘은 몇개 더 있었다고 생각된다.
④ 석현마을은 남쪽에 산이 있어 마을 전체는 북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각 가옥은 동향을 하고 있는 것이 많으며, 남향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마을은 도로로 인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윗마을은 윗마을대로, 아랫마을은 아랫마을대로 집촌임과 동시에 괴촌이다. 기와집은 윗마을에 9채로 집중되어 있고, 아랫마을에는 전혀 없다. 이에서 볼 때 윗마을이 아랫마을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식수는 샘의 형태로 확보하였는데 6곳이 확인된다. 산에서 흐르는 물은 윗마을의 동쪽 가운데를 관통해 흐르고, 아랫마을 서쪽을 경유하여 흐른다. 당산제를 매해 정월에 지내고 있다. 재실은 마을의 남쪽과 서쪽에 마을에서 떨어진,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⑤ 포산마을은 마을 중앙을 경유하는 도로로 인해 둘로 나뉘어 있다. 마을은 산록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분포한다. 가옥의 형태에서 볼 때 집촌임과 동시에 괴촌이라 할 수 있다. 기와집은 윗마을에 3채, 아랫마을에 5채가 있으나, 전체 가구에서 보면 그 수가 적다고 할 수 있다. 식수는 샘의 형태로 확보되는데 3곳이 확인된다. 산에서 호르는 물은 마을의 동쪽을 통해 흐르며, 마을 골목길과 나란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재실은 마을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⑥ 칠전마을은 바로 뒷산은 높지 않으나 동북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가옥은 산록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하단부는 평지이다. 기와집은 16채에 이르나, 역시 전체에서 볼 때 수가 적다. 재실은 마을의 상단과 마을 앞의 산과 동쪽의 골짜기에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식수는 5곳에서 확보하고 있으나, 2곳은 샘의 형태이지만, 나머지 3곳은 우물로 보인다. 마을의 뒷산이 높지 않기 때문에, 지표 가까이에서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8. 결 론
진도에는 선사시대이래 사람이 거주하여 여러 개의 군현이 있었으나, 고려말 왜구의 침입 이후 진도의 읍치가 내륙으로 옮겨갔고, 주민들도 대거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진도의 마을은 세종대 이후 유입된 주민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세종대에는 100여호에 5,6백명의 인구가 있었으며, 18세기에는 6천여 호, 2만을 상회하는 인구가 진도에 거주하였다. 조선후기 진도를 대표하는 성씨를 보면 진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없고, 내륙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만이 존재하였다. 진도를 대표하는 6개 동족마을의 5개 성씨는 復郡과정에서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거나 殉節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이들 가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였다. 동족마을은 여러 성씨가 雜居하다가 한 성씨가 유력해지면서 형성되었으며, 동족마을의 확고한 위치는 入鄕祖가 들어온 후 몇 세데를 경유한 뒤였다. 동족마을은 자연조건의 혜택이 많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건너온 성씨들이기 때문에 마을은 육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해안에 위치하지 않고, 진도의 내지에 자리하였다. 따라서 潮水가 미치는 感潮지대가 아니고, 干潟地가 발달한 곳도 아니었다. 배후에 비교적 높은 산을 두고, 가옥들은 산록 경사면에 배치되었으며, 농지들은 대지 주변과 마을 앞에 분포하였다. 동족마을은 식수·경작지·연료 등의 확보에서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말하자면 촌락이 발달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식수는 지하수가 湧出되는 지표 가까운 지점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동족마을이 형성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기반이 확보되어야 했다. 당시에는 농업이 가장 중요하였기에 동족마을은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하천이 흐로고 있으며, 그 주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대규모의 저수지를 축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저수지 없이도 농사가 어느정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배후에 산이 있어 지표 가까이에 지하수맥이 있어 농사에 유리하였다. 그 논은 '고래실논'이라 지칭되었다. 이 논은 旱害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였으며, 가장 귀하게 여겼다. 소위 門前沃畓이 그것이었다. 논 이외에도 가옥 주위에는 밭이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동족마을의 경우 논과 밭 가운데 논의 비중이 더컸다고 판단된다. 동족마을의 농지소유는 1910년대의 시정을 보면 크게 불균등하여 소규모 농지를 보유한 자가 많고, 그에 반해 대규모 농지를 보유한 자가 적어 심각한 계층분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동족마을이라고 하지만 내부성원 사이에는 심각한 경제적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동족마을의 가옥은 산이 평지와 만나는 산록 경사면에 자리하였다. 산을 북쪽이나 서쪽에 두고 있었고 마을 전체가 동향 또는 남향하고 있었으며, 건물도 남향이나 동향이 대부분이었다. 배후의 산이 남쪽에 있는 경우에도 각 건물은 남향 또는 동향을 하고 있었다. 가옥은 일정한 공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불규칙히고 자연발생적인 塊村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붕은 瓦家가 많지 않아, 그 가세가 내륙의 동족마을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식수는 대개가 샘의 형태로 확보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선조의 제사를 모시는 齋室은 마을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진도의 동족마을을 형성 발전시킨 가문은 내륙의 가문보다 격이 떨이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와가의 수가 많지 않은 데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내륙의 저명한 동족마을보다 지형조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고, 농지조건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진도 내에서는 다른 마을보다는 지형조건이나 농업조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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